#3. 중립은 언제 회피가 될까?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미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by Darlia Park 박다리아

‘중립’이라는 대체적으로 치우지지 않은 좋은 말.

공정함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포용적이기도 한 말.

그래서 종종 말하지 아끼는 태도를 성숙으로도 보며 판단을 유보한다.


가끔은 묻고 싶어진다.

중립은 정말 아무 편도 들지 않는 상태일까. 아니면,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까?

안에서는 분명한 답 있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는 이중성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잘 모르겠다” “중도” “중립”

공격적이지 않으며, 차분하고, 이성적이지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말들을 떠올려본다


이미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있고 균형은 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을 이해한다는 말은 때론

성숙을 가장한 폭력 아닐까


2차대전의 시작에는 아돌프 히틀러는 국가 재건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그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이라 말했다.

명령을 따랐고,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동시에 그는 가정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 명분 아래에서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악의 없이 우리도 종종 말한다.

“내가 결정한 건 아니야.”

“나는 중립이야.”

“그 구조가 원래 그래.”


하지만 삶의 한쪽에서만 작동하고, 다른 쪽에서는 꺼지는 말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거대한 악은 작은 회피의 반복에서 자란게 아닐까,

각자의 자리에서 어디까지 책임지고 있는가.


그리고 혹시,

우리는 또 다른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닌가.


침묵도 비슷하다.

말하지 않는 것이 늘 악한 건 아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가 유지된다면

그 침묵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과는 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방향이 힘 있는 쪽이라면 더더욱.


중립이 회피가 되는 지점은 분명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편한 위치에 머물 수 있을 때


비난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관계도 잃지 않는 자리.

안전하지만, 결코 공평하지는 않는 자리.


나 조차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침묵을 쓴 적이 있다.

더 말하면 감당해야 할 것이 생길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가 해를 입을까 봐.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중립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라면,

왜 그 결과는 늘 비슷할까?


나에게 중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진정한 선함일까 다치지 않으려는 도망일까?


그 질문 앞에서

중립은 더 이상 중립으로 남지 않는다.

중립은 태도가 아니라, 결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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