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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pr 11. 2022

"물질이란 말이야..."  

물질에 깃들여진 내면의 세계

칸딘스키가 남겨 놓은 유산은 그를 단순히 화가로 기억하며 지나칠 수 없게 합니다. 그의 행적에는 그림만이 아니라 연구 노트, 저서, 신박한 이론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시대적으로 추상 미술의 등장은 필연적이었지만 이를 든든하게 받쳐준 것은 정립된 이론에 있습니다. 

추상화는 수많은 화가들의 시도가 일구어낸 회화 형식입니다. 칸딘스키 역시 당시의 예술 흐름에 동조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추상의 당위성을 이론으로 입증한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추상 세계가 뜬구름 잡는 모호한 이야기가 아님을, 그리고 통찰의 시각이 절대적임을 알게 됩니다. 


칸딘스키를 따라가다 보면 과연 나는 사물을 어떻게 보는지 문득 되묻게 됩니다. 당장 내 눈에 비추어지는 광경들은 우연히 그곳이 그렇게 있는 존재입니다. 그저 그런 생각에 무심함이 더해지면 새로울 것도 의미랄 것도 없는 세계지요. 그런데 칸딘스키가 태클을 걸어옵니다. 그저 그런 세계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적인 것에도 정신이 숨겨져 있다고 귀띔합니다. 숨을 쉬거나 움직이거나 말을 하거나... 이 모든 것과 거리가 먼 물질에 정신이 있다니, 물질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란 무엇일지 사뭇 궁금해졌습니다. 

 

눈에 비추어진 외면은 내면을 갖기 마련입니다. 이 둘은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존재입니다. 내면은 특성, 본질, 고유한 무엇 등등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특별히 뽑혀서 있는 것이죠. 이렇듯 내면은 외면과 딴판이라 서로 상반된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두 영역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합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정신은 물질 속에 은폐되므로 물질에는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물질을 통해서 자신을 표출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죠. 


이는 마치 순환논리처럼 이어집니다. 정신은 물질 속에 들어가 있고 물질은 정신은 드러낸다는 명제는 물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숨어 있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칸딘스키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아마도 이 지점일 겁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칸딘스키의 지론입니다. 왜냐면 이를 인식할 정도의 민감한 감수성과 수용력을 누구나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는 종종 관객에 대하여 외적 관계를 찾는 데에 너무 익숙해서 자연모방, 정취, 원근법, 분위기 등에 머문다고 지적합니다. 결코 그림의 내적 생명을 느끼려 하거나 그림에 대한 영향이 직접 자신에게 미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칸딘스키가 왜 그토록 전 생애에 걸쳐 내적 필연성을 주장했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칸딘스키의 내적 필연성은 내적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내적인 시선은 외형의 딱딱한 껍질과 모습을 통과하여 내면세계까지 침투하는 시각을 가리킵니다. 이 시각은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내면의 숨소리를 듣도록 일깨웁니다. 만약 물질에 깃들어 있는 생명이 떨림으로 다가올 때까지 내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면 이내 물질은 자신의 존재를 열어 보여줄 것입니다. 칸딘스키 말마따나 죽은 물질이 살아나서 감정을 전해 오는 것이죠.

 

세상 만물에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것은 제각기 내면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체는 물론이고 책상이나 의자 등 모든 물체와 점, 선, 면, 색채 등 모든 조형적 요소까지, 아무튼 모든 존재에 내면의 세계가 있다면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요? 칸딘스키는 내면의 세계란 감각의 진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온다고 답합니다.

 

칸딘스키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합니다. 이는 홀로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고 공간음악처럼 주변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소리를 퍼뜨리는데 칸딘스키는 이것을 내적 울림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그의 예술론 전체를 가로지르는 내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핵심입니다. 

이로써 앞서 이야기한 사물에 깃들여져 있는 정신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해결된 셈입니다. 바로 내적 울림이지요. 우리의 영혼은 사물의 내적인 울림에 반응합니다. 내적인 울림이 영혼을 진동시키고 심오한 세계를 건드려서 정서의 동요를 불러오는 것이지요. 대상과 관찰자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결국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사물을 대할 때 존재 자체로 볼 것을 추천합니다.  

우리의 눈은 습관이나 목적이라는 편견에 덧씌워져 있기에 순수한 시각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모자를 본다고 하면 머리에 쓰는 사용 용도를 염두에 두고 봅니다. 모자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자 자체를 순수하게 볼 수 없는 것이지요. 목적이 선입견처럼 작용하여 여타의 것을 발견할 수 없게 가로막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추상화가들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물을 실용적인 목적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순수한 시각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형태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한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어떤 대상을 묘사하기 위한 매개체도 아니라는 것, 즉 형태는 그 자체로서 현상계에 있는 하나의 사물이며 존재임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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