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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pr 07. 2022

제목에 갇히다

추상화의 이데아 

우리는 경험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쌓아 놓은 인식이 있고 저마다의 논리를 습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각자의 눈높이가 되어 주고 내밀한 곳에 기준도 만듭니다. 서로의 가치 판단이 다르고 보는 세상이 다른 이유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지입니다. 


회화는 대상을 화면으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동굴 벽화 시대 때부터 변함없이 해온 이 대상의 이미지화는 시대의 목적에 부응합니다. 실물과 똑같이 묘사하는 일에만 매달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회화는 각각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며 실재를 이미지화합니다.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유물을 보며 감탄합니다. 우리들의 눈을 훔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테크닉에 있습니다. 높은 수준에 도달한 고대인들의 경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았던 플라톤은 이러한 이미지를 가상의 세계라고 저평가했고 기만적인 눈속임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오늘날 최첨단이라고 일컫는 가상의 세계를 플라톤이 무어라 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사실은 있지도 않은 것에서 여러 가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거래를 하며, 역시 실재가 아닌 가상의 돈으로 계산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첨단이라고 일컫지만 이러한 가상은 가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현실과 밀착되어 있고 결속되어 있지요. 자본의 논리 속에 갇힌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폐쇄적이지요.


플라톤의 이미지는 회화에 진리라는 화두를 던집니다. 플란톤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세계를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현상이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와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이지요. 감각은 절대로 이데아에 이르는지 못합니다. 왜냐면 감각이 철학적 통찰을 왜곡시키고 굴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통찰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지만, 감각의 소산물인 이미지와 같은 현상이나 환상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뿐입니다.  


플라톤에게 화가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점에서 보이는 대로 모방하는 제작자입니다. 또 모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닮은꼴의 환영에 불과하다, 실재성도 없다, 현실성도 결여된 눈속임이다.' 이렇듯 플라톤은 이미지에 대하여 진리와 거리가 먼 모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플라톤의 평가는 지당합니다. 이미 화가나 조각가들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과 있는 그대로 옮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방이나 재현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왜곡이 필연적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보다 왜곡이 더 실제처럼 보이는데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왜곡은 거의 필수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석고 데생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보다 그림자를 더 두텁고 진하게 함으로써 분명한 볼륨의 효과를 거둡니다. 그 덕에 실물과 같게 보이려는 목적에 한발 더 쉽게 다가서는 것이지요. 분명 소묘의 테크닉은 존재합니다.


갑자기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플라톤의 이원론을 검색하는 이유는 추상화가들의 시각 또한 이원론에 기원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인류 역사 이래 곳곳에 자리합니다. 플라톤은 현상과 진리, 감각과 이데아라는 대비되는 두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진리는 이데아에 있음을 주지 시킵니다.

 

이데아는 현상 세계를 초월한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입니다. 이는 미 자체 혹은 미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세계이며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원형들이 거주하는 세계입니다. 이데아의 본성은 항구 하며 영원하고 순수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지론입니다. 현상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인 것이죠. 물론 감각적이고 일회적이고 가변적이며 순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론은 철학 개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원론의 세계는 추상 이론의 근골격과 같습니다. 추상화가들은 세계를 정신과 물질로 보았으니까요. 세상 만물에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칸딘스키의 주장도 이와 같은 흐름입니다.  추상의 이미지는 현상의 모습이 아닌 대상의 원형, 본성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추상화를 감상하며 여전히 외형의 모습에 매여서 제목의 모호함과 의미를 캐묻는다면 곤란합니다. 환영만 찾는 습관은 직관적인 감각을 도태시킬 뿐이니까요. 그것은 암기와 지능만 앞세운 지식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암기식 학교 공부가 추앙되는 시대라 해도 이곳에서는 다릅니다. 예술은 주입되는 지식이 아닙니다. 


직관의 능력은 이성에 의해서 건설됩니다. 말초신경과 같은 감각이 아님을 확실히 이야기해 두고 싶습니다.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니까요. 화가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만 본 것만 그리지 않습니다. 소설가가 실재 경험을 쓰면서 말 그대로 소설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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