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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pr 04. 2022

자각

회화의 정체성 

인상주의는 한 시대를 지배한 양식으로서 공통된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마지막 예술 경향입니다. 미술 역사에서 보여준 보편타당한 양식의 합치가 인상주의 이후에는 쉽지 않다는 뜻이죠. 이런 의미에서 인상주의는 분기점에 있는 예술입니다. 


20세기 이후 인류가 겪어야 하는 변화는 이전의 속도와 다르고 내용도 복잡합니다. 마치 배수에 배수를 더해가듯 하지요. 그만큼 환경이 치열해진 겁니다. 예술가들 역시 새로고침을 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된 거지요. 이제 예술은 예술에게 집중합니다.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된 회화 요소에 대한 관심은 긴긴 세월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던 대상을 등한시하게 합니다. 화면에 구사되었던 문학적인 사연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지요. 회화가 자각을 시작한 겁니다. 자신만의 독자성, 즉 색채와 평면은 회화만의 자산이라는 겁니다. 또 회화의 정체성은 '보다'와 '그리다'라는 두 행위에 있다는 것이죠. 


그러하니 풍경, 초상, 정물이라는 영역으로 나누는 일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일이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오로지 시야를 확보하고 보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시각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에 치중하게 됩니다. 모네의 연작 <건초더미>가 그 예입니다. 모네가 하나의 소재에 꽂힌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시각, 현상을 묘사하려고 같은 그림을 수 차례 반복하여 그렸습니다. 세잔느의 정물화나 연작 <생 빅트와르 산> 도 같은 의도에서 실행된 것입니다. 이쯤 되면 그림을 그렸다가 아니라 연구했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건초더미> 1891 모네
<건초더미> 1891 모네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하여 ‘본다’ 또는 ‘보인다’라는 시각적 의미의 급부상은 어떤 감각, 어떤 자극이 중요해졌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제부터 화가들의 가공되지 않은 감각의 데이터는 날개를 펼치게 되지요. 나는 이러한 전개가 마치 오늘날의 랩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날 것 그대로의 가사를 거침없이 뱉어내듯 배설하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아무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리적인 감각은 차차 비중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현실의 일상적인 모습도 점점 더 자취를 감추게 되지요. 그 대신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있어요. 경험을 구성하는 원료입니다. 이는 시각요소라는 명칭으로 거듭나며 잘게 부수어진 관점을 자랑합니다. 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색과 형태까지 분석적 시각은 비켜가지 않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의 불러온 파급 효과는 우리가 경험했던 형상과 색채를 일그러뜨린 것 그 이상입니다. 현대 예술가들의 말마따나 고유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씨앗을 뿌려 놓은 셈이니까요. 예를 들면, 우리는 대상을 색채와 함께 보고 저장합니다. 후에 이를 기억해야 할 때 색채와 함께 쉽게 떠올리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태양은 어떠하다 했을 때 형상은 항상 색채와 함께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색은 대상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 인상주의의 수확이고 유산입니다. 이는 현대미술에게 홈런이라는 결정타를 날린 셈입니다. 자세히 말해서 태양의 색에 빨간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요. 이때 빨간색은 선입견에서 오는 색입니다. 진면목을 습관, 편견, 선입견 등이 가리고 있다는 것이죠. 본질이 되는 색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이로써 우리는 늘 보고 있던 색이 아니라 아주 생경한 색을 만나게 됩니다. 대상과 연결되지 않은 색의 세계인 것이죠. 캔버스를 한두 가지 색으로 채우는 색면주의도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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