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숙경 Mar 31. 2022

대도시의 내밀한 예술

새로운 예술이 뿌리내릴 곳은 대도시입니다.

기술 진보시대에 문화의 무대는 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예술이 뿌리내릴 곳은 현대적 의미의 대도시라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뒤섞여 있는 대도시는 개인의 독자성과 고독감을 대변하는 내밀한 예술을 산출할 줄 압니다. 빽빽한 군중 속에서의 고립감, 낯선 무리 속에서의 외로움이라는 감성은 대도시의 것입니다. 이는 곧바로 인상주의에 투입되고 섬세한 감각, 기분, 자극 등으로 발산됩니다.

 

인상주의는 도시적인 예술입니다. 세상을 도시인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극도로 예민한 신경과 긴장된 시선으로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민감한 감수성과 감각의 반응은 감각적인 지각을 팽창시키고 강화시킵니다. 실제 인상주의자들은 도시생활의 다양한 변화, 신경질적인 리듬, 갑작스럽고 날카롭지만 언제나 사라지기 마련인 현상에 집중합니다. 이들의 시점은 고정되지 않아요. 자연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멈추지 않는 반복과 과정에 초점이 있으니까요.


 덕분에 모든 것은 여러 변형들로 해체되고, 분리된 조각들은 미완의 단편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닙니다. 그러니 이들이 마주한 모습은 그동안 보아왔던 이미지가 아닌 것이지요. 그것은 분명하고 안정감 있게 우뚝 서있었던 것과 사뭇 다른 것으로 객관적인 실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전조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본다 라는 주관적인 시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인상주의가 보여준 순간과 변화와 우연이 우선한다는 것을 미학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생활을 지배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변덕스럽고 분명치 않고 모호한 속성이 삶을 지배한다는 것이지요. 순간적 기분에 민감하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전제로 합니다. 인생에 대하여 수동적이라는 말이지요. 즉 현실에 대하여 방관자로 남겠다는 뜻이며 뒤로 물러나 관찰자로 구경만 하겠다는 말입니다. 요컨대 심미주의적 태도인 것이지요.


심미주의는 인상주의에 와서 절정을 보여줍니다. 바로 인생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 체험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및 쾌락적 감각주의의 표현이지요. 이것은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으로 한 자리 차지하여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술에 대한 심미적 편견입니다. 


심미적 관점에서 예술작품은 스스로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 영역 외의 것에 대하여 철저히 무관심할 것을 장려하며 이런 자세를 영웅적 이상으로 추켜 세우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예술을 착한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줄 대중은 없지요. 결국 대중은 예술을 값비싸고 쓸모없는 것, 자유롭고 사치스럽고 여흥과 같은 것, 나름의 형식과 색채와 선의 조화에 헌정되는 것으로 취급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심미적 문화는 낭만주의적 체념과 수동적인 태도를 뛰어넘어 예술을 위해 인생을 탕진하고 예술 자체 속에서 인생의 정당성을 찾는데 주력합니다. 마치 예술을 인생의 환멸에 대한 유일한 보상처럼 여기는 것이지요. 불완전하고 불명료하기 마련인 인간 존재의 실현을 위하여 이만한 것이 없다는 최후의 보루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불편한 현실이 낳은 체념과 관조의 문화입니다. 인상주의는 여기에 과학을 첨가한 것이지요. 낭만주의의 현실에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은 허구의 삶을 선택하게 하였고 이것은 실제가 아닌 몽환적 풍경화로, 위선적인 장식을 잔뜩 뒤집어쓴 초상화로 표출됩니다. 인상주의는 여기에 과학적 조미료가 섞여서 명료해 볼 뿐입니다. 


이로써 예술의 완전한 자기 수정 시대의 서막이 열립니다. 자기 수정이라는 말 그대로 예술가들만의 예술,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자본주의의 예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