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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Mar 28. 2022

자본주의의 예술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생활감정의 격동

예술의 고객층은 누구였을까요? 18세기 중엽까지는 주로 귀족층이었지만 이후 상층 중간계급까지 넓혀지고 19세기 중 후반에 이르면 더 확대됩니다. 산업화와 자본화의 발달이 속도를 내면서 사람들의 기호도 바뀝니다. 더구나 산업사회는 학교교육을 탄생시켜 문맹률을 낮추어 놓지요. 읽고 쓸 줄 아는 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고객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고객층의 변화는 예술가들에게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이들은 누구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으니까요. 정해진 영역과 범위에서 일정한 계층을 충족시키던 예술활동이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한 것입니다.  

 

인상주의 이전에 고전주의를 넘어선 낭만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있습니다. 이 예술사조에서 예술과 대중의 서먹함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회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지내고 싶습니다. 이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웠기에 현실보다 꿈을 좇습니다. 반면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자들은 사회문제에 적극적입니다. 이들은 지배계급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사회고발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대중의 천박함과 무감각을 공격했지만 설교하려는 열망도 저버리지 않았기에 직접적이며 강력한 메시지를 작품에 충실히 담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설교당하거나 어떤 메시지에 열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예술가들은 대중의 인기보다 자기들끼리 나누는 교감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대중의 감상 수준이 호응할 정도로 갖춰지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예술가들이 자의식을 채우려는 욕구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지요. 


아무튼 1850년대의 고객은 디킨스의 소설이나 도미에의 판화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읽고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00년이 되면 폴 세잔느의 그림에 대하여 감탄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힘든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예술가와 대중이 동일한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서로는 괴리감을 갖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두 재판관의 대화 1808-1879 도미에
강기슭 1904 세잔느

인상주의자들은 단절을 통보한 셈입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대상을 그리지 않고 대상에 대한 인상을 그린다고 조롱했고 그 덕에 얻어진 이름이 인상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만한 명칭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에 목숨을 겁니다. 이제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림 그리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내밀한 성격을 대변하듯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잠재력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입니다. 


아널드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인상주의 미술을 적나라하게 해부하지요. 인상주의 미술이 도시적이고 심미적이라는 것과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우저의 시선은 예리합니다. 그는 예술이 사회 관계망에 어떤 모습으로 표출되는지 여실히 증명해 냅니다. 

 

금융 및 산업 자본주의는 오래전부터 예정된 방향으로 차곡차곡 발전해 옵니다. 경제활동은 이미 고도 자본주의의 단계에 접어들어 소위 자유로운 실력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철저히 조직화되고 합리화된 체제를 갖춥니다. 이익 범위와 관세구역과 독점영역과 카르텔 그리고 기업조합 등으로 첨예한 이해관계의 그물망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의 규격화와 집중화는 사회계급구조에 압박이 가해지고 이는 곧 사회에 불안의 씨앗이 됩니다. 


엄청난 기술의 진보는 개인에게 위기감을 실어 옵니다. 미친 듯한 발전 속도와 무엇에 쫓기는 듯한 여러 변화는 유행을 촉진시키고, 이는 취미 기준에 혼란을 야기하며 오로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쉴 새 없이 새것을 추구하는 무의미한 개혁 욕을 자극합니다. 


기술 성과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기업은 요즘 말로 지속적으로 신상을 출시하며 새것에 대한 채찍을 가합니다. 새것이 금세 낡은 것이 되는 세상에서 물질에 대한 애착은 옅어지는 법입니다. 뒤따라 정신적 재산도 흔들리는 거지요. 예술과 철학에 대한 가치도 유행의 속도에 반응하면서 사람들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생활감정의 격동적인 파도에 휩쓸립니다. 인상주의는 무엇보다도 이런 동적인 감정을 잽싸게 낚아챈 것이지요.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환경은 인상주의에게 그들만의 세계관을 심어줍니다. 세상은 쉴 새 없이 변하는 상태의 연속이며 무수히 많은 현상의 연속체라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관찰자의 입장과 시점은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현상의 순간은 강조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는 과도기일 뿐이며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불변의 진리라는 전통적인 개념이 존중될 수 있을까요? 이제 우연이 모든 존재의 원리처럼 여기지기 시작합니다. 우연이 진리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거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예술을 통해 발견하고자 했던 인간주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인의 지금과 여기라는 시점에서 진리의 기준을 찾기 때문에 인간 역시 사물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물질로 도용되는 비인간화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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