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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pr 18. 2022

점에게 자유를 주자

우리는 글을 읽고 쓰며 타인과 소통합니다. 책뿐만이 아니라 간단한 안내 글귀까지 주변에 널린 게 문장이지만 마침표로 찍혀 있는 점까지 눈여겨 주시하진 않아요. 너무나 익숙한 탓에 특별히 눈길을 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아무튼 점이 발견되는 곳은 그림보다 문장입니다. 


문장 속의 점은 언어에 속하고 역할을 지게 됩니다. 점은 하던 이야기를 끊어야 함을, 이만 경계 짓고 다음 내용으로 넘겨야 함을, 한 호흡 쉬어야 함을 우리에게 신호합니다. 점이란 열일 하는 기호인 것이죠. 


칸딘스키는 이러한 점의 씀씀이에 대하여 아예 문장으로 펼쳐서 보여줍니다.  


      오늘 나는 영화관에 간다.

      오늘 나는 간다. 영화관에

      오늘 간다. 나는 영화관에 


문장과 점의 관계가 보이나요? 점이 문맥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느껴지나요? 분명 점은 문장의 의도에 참여합니다. 말하려는 내용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으며 비논리적으로 사용되면 뭔가 잘못 꿰어진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칸딘스키는 문장 밖으로 점을 빼놓아 좀 더 자유를 허용하기로 합니다.


      오늘 나는 영화관에 간다

                       


그러나 점은 아직도 자유롭지 않아요. 칸딘스키는 그 이유를 공간에서 찾습니다. 점에게 마음껏 운신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가까이 있는 문장의 영향력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에 점이 위축되는 상황이고 결국 점의 독자적인 힘은 꺾이고 만다는 것이 칸딘스키의 변론입니다. 


칸딘스키는 이를 두고 '점의 울림이 연약하고 겸손하여 곁에 있는 문장에 매몰되고 만다'라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그는 문장에서 점을 완전히 독립시켜 봅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말끔히 치우고 점을 초대하는 것이죠.  

         .


이 시도는 부여된 목적과 습관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면 길들여진 시각이 존재 자체를 볼 수 없게 방해한다는 확신 때문이지요. 칸딘스키는 본질을 발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상이든 아니든 그 안에 있는 본질이니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감각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이죠. 


본질은 내적 긴장과 밀접해요. 내적 긴장은 심연의 깊은 곳에 있던 본질이 드디어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힘인 거지요. 이 힘 덕분에 내적 울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요. 칸딘스키는 이 울림을 가리켜 내적 고유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줍니다. 


칸딘스키가 즐겨 사용한 용어가 있어요. 내적 고유성, 내적 필연성, 내적 긴장, 내적 울림 등입니다. 그야말로 칸딘스키의 애착 언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하나같이 생경한 것들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그의 이론 전체를 아우를 수가 있고 개요를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찬찬히 보면 단어 자체에 이미 정보가 담겨 있어요. 모두 내면에서 일어나는 활동에 관한 것들입니다. 


거창해 보이는 본질을 운운하며 이러저러한 시도를 한 것은 결국 고유성을 찾아가는 발걸음인 셈입니다. 고유성이란 특성과 다른 것이지요. 고유하다는 것은 오로지 한 존재에만 있는 것을 말하니까요. 특성은 너도나도 가질 수 있는 공통분모의 대상이 있을 수 있지만 고유성은 사정이 다릅니다. 단 하나만 있기 때문에 고유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칸딘스키가 이러한 고유성에 각별한 이유는 당연한 겁니다. 무엇과 섞이거나 어우러져 통합될 수 없는 고유성이 있기에 추상 활동이 가능한 거니까요. 즉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 고유성 덕분인 거죠. 


이제 점 자체로 다시 태어난 존재를 만나 볼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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