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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pr 25. 2022

점의 고유성

칸딘스키의 저서「점, 선, 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하학에서 점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비물질로 정의해야만 한다. 물질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 점은 제로(Zero)와 같다. 

제로(zero)는 서로 다른 인간적인 속성들을 숨긴다. 하지만 기하학에서의 점, 제로(Zero)의 측면은 더할 나위 없는 간결함을 의미한다. 즉 최대의 억제(자제)를 가리키는데 이 와중에 점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하학의 점은 최종적인, 유일한, 언어와 침묵의 병합이다" 


칸딘스키의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신념과 같은 의지는 여기에도 등장하네요. 소문자를 사용한 제로와 대문자의 제로는 서로 다른 영역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이 포괄되어 있는 응축된 점이라고 생각돼요. 숨어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실상은 있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니 물질 세계인 셈입니다. 반면 후자의 제로는 앞서 살펴본 문장에서의 점, 언어에 속한 점과 같이 내면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비물질인 거죠.  


기하학에서의 점이 언어의 구조 속에 들어가 제 역할을 함으로써 성립된 점의 개념은 짧거나 긴 침묵입니다. 칸딘스키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점은 내적으로 가장 간결한 형태다. 점은 스스로 자신 안에 침잠한다. 점의 긴장은 언제나 중심 집중적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원래 침묵이란 최고도의 자제를 동반해요.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침묵인 것이죠. 단순히 입 다물고 있는 조용함을 말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침묵 속에 있는 사람은 설사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자제력을 유지하며 절제된 모습을 잃지 않죠. 그래서 칸딘스키는 위와 같은 명제를 점으로부터 끌어 내올 수 있는 겁니다. 


이와 더불어 살펴볼 칸딘스키의 점에 대한 관찰은 흥미롭습니다. "점은 어느 정도 사방으로부터 동일하게 떨어져 있으며 주변으로부터 거의 빠져나와 있다. 점과 주변과의 융합은 최소한으로 미미하다. 더욱이 아주 둥근 점일 때는 이 융합조차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자기 위치를 어찌나 확고하게 주장하는지 수평 수직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이지 않으며 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경향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도 전제하지 않는다."


이렇게 칸딘스키는 점의 고유성을 발견한 것이죠. 정리하자면 꾸준한 주장, 간결함, 확고함, 재빠름 등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이 고유성이 시사하는 의외의 사실은 점의 내적 성향이 정사각형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원과 유사할 것 같지만 단 한 가지를 빼면 공통점이 없어요. 점과 원이 공유하는 건 중심 집중적인 내적 긴장뿐입니다. 


정사각형에는 평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끝없이 자기주장을 하는 내적 성향이 있어요. 이 부분이 점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이죠. 사람 성격으로 치면 고집불통인 거죠. 하지만 강한 신념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어요. 아무튼 점의 고유성은 작품 안에서 자기 목소리로 그리고 특유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로지 점으로만 완성했다는데 점이 보이지 않는 작품이 있어요. 어떤 형체를 나타내려고 주력한 나머지 점을 선처럼 보이게 한 거죠. 


이를 두고 칸딘스키는 점의 부당한 적용이라고 지적하고 나섭니다. 이때 점은 형상의 억압으로 점 자체의 울림이 약화되는데 이런 상황을 칸딘스키는 "점에게 가해진 비참한 반죽음의 선고"라고 표현해요. 그가 얼마나 조형 요소 하나하나에 세심한 눈길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칸딘스키는 점묘화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아요. 점이 점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의 관점에서 점이 면처럼 보이는 효과는 점의 독립적인 역할을 방해하고 억제시킨 결과이니까요.


추상예술에서는 요소의 완전한 울림을 꾀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입니다. 어떤 요소의 울림도 은폐되거나 억제되길 원하지 않아요. 이 말인즉 요소의 울림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여타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인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결이 다른 서로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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