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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ug 12. 2022

관계의 그림 - 몬드리안

우리 모두는 똑같은 대상을 관찰하지만, 색채, 구성, 내용 등 각자의 관심에 따라 멋있다, 슬프다, 색조가 심오하다 등등으로 관람평을 내놓는다. 나는 여기에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권한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이 보였는가,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거의 다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가가 본 것은 무엇인지 그의 시선을 쫓아보는 건 그림을 이해하는 쉬운 방법 중에 하나이다.

 

화가의 눈, 그의 시점을 따라가면 그가 본 대상을 그와 함께 바라보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한 바로 그곳에 당시의 모습과 생각이 우리들 앞에 펼쳐지므로 화가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그림을 음미하면 나름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1900년에서 1910년경, 몬드리안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강변, 농가의 풍경이 주류를 이루는데 대체로 관조적이다. 우울할 만큼 내려앉은 색조 때문인지, 달이 뜨는 시간대 때문인지, 잠잠한 구도 때문인지, 이 시기에 몬드리안이 본 풍경은 어떤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Amhem의 풍경. 1900-1901.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다는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을 자각하며 풍경화의 지평선에 시선을 멈추면 화면의 구도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훗날 몬드리안에게 중요한 수평선이 의식되는 건지 유독 지평선이 진하게 그어진 선으로 다가온다. 이 지점은 풍경화의 축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이를 중심으로 다른 이야기들이 덧붙여지므로 이를 감안해서 살피면 화가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감지하게 된다.


실상 풍경에 등장되는 건 몇 안 되는 소재들이다. 이것들의 위치와 크기 그리고 색채, 이들의 조합이 서로 다른 풍경화를 그려낸다. 몬드리안 식으로 말하면 이들의 관계가 곧 회화 작품인 거다. 보통 생생한 사물들의 정보를 통해서 관계를 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확한 표현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외적인 것으로도 내면의 세계를 전달할 수 있지만, 추상화가들은 이보다 더 심층적인 본질에 다가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달 빛의 해인강을 따라. 1903


몬드리안은 관계만 생생하게 보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풍경화 속에 펼쳐진 나무와 지평선에서 이 둘의 순수한 관계만 보고 싶은데 나무라는 사물의 정보와 지평선을 이루는 이러저러한 모습들이 방해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관계만 보고 싶은 것이고, 대체 관계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그가 참여한 미술운동 <De Stijl>의 간행물에 기고한 ‘자연의 리얼리티와 추상적 리얼리티’(1919, 1920년)에서 찾아본다.


‘이 풍경화에서 수평적인 것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수평선이다. 즉 위치상 명확하게 표현되는 건 오직 하나라는 말이다. 반면 수직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위치이든 간에 선으로 표명되는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 풍경화에서 지적하고 싶다. 이 와중에 대립은 하늘에서 표출되는데 광범위한 평면처럼 나타나 상승된 위치에 있다. 불명료한 면, 정말 정확하지 않은 면 위에 달이 정확하게 점으로 놓이면, 하늘의 면은 이 점에서 수평선까지 경계를 짓는다. 이러한 정의의 수직선은 자연 속에서 드러내지 않으며 존재하며 우리에게 수평선에 대한 명료한 대립으로 남게 된다.’


이런 방식의 위치 관계는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이라는 조형 관계를 집중적으로 따져보게 한다. 자연의 평형을 곧 평온으로 해석한 대다수의 명상가들처럼 몬드리안 역시 자연의 조화를 순수한 평형에서 찾았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자연 속에 내재된 관계를 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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