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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Aug 19. 2022

식별하기의 어려움

예술은 감각의 표현이지만 감정과 같은 주관적 판단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관이란 제한된 울타리 안에 갇혀 때때로 미숙한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주관적 태도로 세상을 관찰하고 평가하지만 이를 발판으로 각자의 시야를 확대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본 것 외의 것을 보려고 의식하지 않는다면 신변잡기에 자신을 가두는 꼴이기에 그렇다. 


이 주관적 관점을 유독 불편해했던 가로 몬드리안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주관적 시각을 넘어서 객관적 시각으로 복귀하기를 갈망했다. 주관성을 초월한 세계, 자연상태 너머 존재한다는 또 하나의 ‘리얼리티’, 곧 보편 세계를 향한 의지로 유토피아를 꿈꾸게 한다. 그가 지향한 보편이란 신지학에 바탕을 둔 불변의 세계로 모든 사물의 기저에 보편적 본질이 내재되어 있다는 담론에서 출발한다. 제각기 모습이 다를지라도 이 보편성 덕분에 세계는 본질적으로 조화로운 상태에 놓이고 유지된다는 거다.


그러므로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흔들리는 감정은 배제된다. 전체를 다스리는 구조, 균형을 잃지 않는 평형이 회화의 목적이 된다. 이 덕분인 듯 추상화 중에서 별 반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림 중의 하나가 몬드리안의 그림이다. 어디 이뿐이랴. 그래픽 디자인이나 패션 등등 몬드리안의 모티브가 곳곳에 퍼져 있는 것을 보면 몬드리안만큼 가까이 있는 화가도 드물다. 


평형이란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는 관계를 전제로 한다. 어쩌면 본다는 행위 자체도 나와 대상의 관계 맺기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눈높이는 중요하다. 단순히 키 차이만 해도 포착되는 세상이 다른데 하물며 사고의 폭에서 오는 눈높이의 차이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이쯤에서 몬드리안이 말한 보통의 시각, 평범한 시각에 빗대어 나의 눈높이를 가늠해보자. 그의 말마따나 자연은 보편적인 것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들이 그것을 인식하기란 어렵다. 또 우리는 의식 속에서 살고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의식이란 대상이 어느 정도라도 묘사적이기를, 그 대상과 간접적인 거리가 유지되기를 요구한다. 당연히 시각은 사물 중심에 머물게 되고, 시선은 외부에 머물며 내면을 향할 수 없게 된다. 우리들이 쉽게 조형적 시각을 가질 수 없는 이유이다. 


하나의 부두가 있는 해변, 1909.


건초더미, 1908.


위의 그림은 대상의 윤곽과 제목이 그림의 소재를 설명해 주는데 이런 설명은 순수한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묘사 덕분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이 없어서 대상 외의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 거다. 미리 정해진 한계치는 의식에게 이미 입력된 정보를 소환하게 하고 이와 함께 그림 속 소재를 비교 평가하도록 인도한다. 화가의 의도는 차후에 보기로 자연스럽게 미루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번번이 놓치는 것은 이 순간에 발생한다. 


몬드리안은 풍경을 그렸지만 자연의 모습을 그린 게 아니다. 그는 자연을 다르게 그린다. 자연은 이미 완벽하기에 굳이 예술로 나타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예술가가 표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건 자연의 내적인 세계라는 거다. 그러므로 자연을 좀 더 완벽하게 보기 위해서 그 모습을 변형시키는 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자연은 빛에 의해서 상시 변환한다는 당시 화가들의 화두를 상기해야겠다. 빛에 의해 달라지는 형태와 색채를 몬드리안 역시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에서 사진과 같은 사실적 관계만 본다면 완벽한 리얼리티에 의해 발생된 미적 감정을 경험할 수 없을 거라고 충고한다.


다시 위의 두 풍경화로 돌아가 보면, 대상에 의한 면 분할이 보인다. 대상이 완벽히 사라진 추상이 아니므로 대상의 영향을 완벽히 거두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물을 설명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으므로 우리의 관심은 저절로 사물에서 멀어지게 된다. 담대한 붓 자국이 양감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듯하지만 이내 편편한 평면으로 스며들어 면 분할을 돕는다. 그가 표현한 것은 세세한 부분들이 살아 움직이기보다는 서로 종속된 모습이다. 개별적인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그가 꿈꾸는 불변의 세계를 구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것이 문학, 음악, 미술, 어떤 장르이든, 나의 사고를 한 뼘씩 늘리는 일이고, 미처 누리지 못한 세계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 변화무쌍한 의지가 춤을 추는 자본주의 인간들에게 몬드리안의 유토피아가 어떻게 비추어질까? 관조와 거리가 먼 사회에서는 말초적 감각이 쉴 줄 모르고 사람들을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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