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숙경 Sep 01. 2022

지워질 거라는 예보

인상주의의 결과물은 근사한 색감의 풍경, 정물, 인물 등 비교적 예쁜 그림에 속한다. 오늘날 세련되고, 감성적이고, 모던한 감각까지 갖춘 편안한 그림으로 서슴없이 인상주의 그림을 꼽을 거라는 건 오해일까? 


자본주의가 불러낸 중산층, 이들 인상주의의 후견인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후원 없이 지속되기 힘들지만 예술만 할까? 시대마다 주도권을 쥔 계층의 대변인 격인 예술은 세계가 왕정시대에서 자본 시대로 재편됐음을 알린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은 평상시에는 도시 풍경을 즐기고, 휴일이면 근교에 나가 시간을 보내며 과거 귀족을 본뜬 삶의 패턴을 만들었다.  이들은 스스로 일반 대중보다 지적이고 품위 있다고 믿기에 인문학적 치장과 기호로 자신의 품위를 드러내려는 욕구에 거침이 없다. 이 성향은 진화할 수 없는 것인지, 박제된 것인지 오늘도 사회 곳곳에서 존재를 과시한다. 


인상주의의 수확은 빛과 색채를 주인공으로 격상시킨 것에 있다. 그동안 중심자리에 있었던 대상은 빛과 색채를 묘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드러난 도우미 역할 정도로 밀려난다. 세계의 재편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회화에서도 일어난 거다. 대중, 엄밀히 말하면 중산층의 기호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환경의 조성이다. 


인상주의가 쏘아 올린 세분화된 시각과 시점은 점점 가속화되어 그토록 많은 이즘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기여한다. 이제 사람들은 각각의 자리에서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증명하고 퍼뜨려야 하는 생존의 법칙에 임하며 자본 시대의 참 맛인 경제 가치에 모든 것을 맡긴다. 덩달아 회화의 요소인 형태와 색채도 이제부터 제각각 자기 이야기를 펼쳐야 한다. 그러므로 색채와 형태의 분석과 분리는 필수적이다. 


입체주의 화가들은 뒤틀린 대상을 보여준다. 몬드리안이 위치와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해서 재구성한 이들의 관점에 점수를 후하게 준 이유는 조형성에 있다. 신인상파나 점묘파는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 그가 주장하는 비극적 조형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큐비즘만이 자연 형태에서 빠져나올 줄 알고, 자연의 외형을 순화시킬 줄 안다고 여겼다. 입체주의 시각에 힘입은 몬드리안은 대상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큐비즘처럼 재구성하지는 않았다. 


회색 나무, 1911.


<회색 나무>는 나무의 골격을 드러내지만 곧 ‘나무’라는 형태가 지워질 거라는 예보를 한다. 몬드리안은 놀라울 정도로 풍경과 사물 데생에 열심이었다. 대상을 어떤 차례로 지워 나가야 합당한지 진작부터 계획한 듯 세밀한 묘사까지 놓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대상의 분해는 그에게 자연스럽다. 


대상이 해체됐다고 해서 파괴로 보지 말라는 건 몬드리안의 주문이다. 그의 입장에서 자연 형태를 지우는 건 자연의 가장 외적인 성질을 벗겨내는 것이다. 기존의 것이 파괴된다는 건 재건이 따르므로 우리는 새로운 조형의 설립을 기대해도 되겠다. 


신지학에 매료된 몬드리안은 세계를 물질로만 볼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위세를 떨치며 물질적 위상을 강조할 때 모두가 여기에 휩쓸릴 수 없다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별함 때문이다. 추상화의 등장은 우리가 물질과 더불어 관념적이기도 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선 구성, 1917.


몬드리안은 대상을 해체함으로써 <선 구성>과 같은 화면에 도달한다. 순수한 세계, 진리를 발굴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짧고 굵은 직선의 결정체로 표출된다. 자연의 내부와 외부, 삶에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남성과 여성 등 이 모든 것이 응축된 표현이다. 


예술은 언제나 순수를 추구한다. 이를 위하여 몬드리안은 이원성을 호출한다. 언뜻 철학 용어로 비치는 이원성이란 대립된 두 영역으로 이해하면 간단하다. 명확한 대치의 힘이야말로 팽팽한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이고, 모든 것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말이다.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이원성,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조화라고 여겼던 몬드리안은 삶에서도 이러한 조화가 기쁨을 보장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평형상태의 이원성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에 대한 몬드리안의 묘책은 의식의 성숙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 대립적 힘을 잃고 정신적인 것이 명료해질 때까지 의식을 훈련하라고 한다. 외적인 것은 갑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외적인 것의 가장 내부에 있는 추상적인 것을 경험할 때 비로소 변화로 다가올 거라는 몬드리안의 충고가 새삼스러운 오늘이다.  

작가의 이전글 단편적인 것에 뺏긴 시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