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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Sep 05. 2022

감정의 평정? 추상의 답은 우리 안에 있다

추상화가들에게 내면의 시각은 중요하다. 지향하는 가치가 다를지라도 이에 대한 강화는 공통적이다. 몬드리안이 우리에게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는 사물을 더 깊이 보아야 하고, 추상적으로 특히 보편적으로 지각할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변덕스러움을 극복하고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평온함을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몬드리안이 평생 주장한 또 다른 리얼리티, 추상적 리얼리티이다. 


내면의 시각, 추상적 시각, 조형적 시각, 이러한 관념적인 용어들은 난해하게 들린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보라는 건지, 그들만의 은어가 아닌지. 


그런데 추상화의 열쇠는 이러한 난해함과 은어에 있다. 알고 보면 간단하지만 누구나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분리 현상이다.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성찰이나 통찰을 위해 얼마의 시간을 할애하는지 물어야 한다. 무언가를 성찰할 수 없는 사람은 추상을 경험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다. 


몬드리안은 조형적 시각을 ‘사물에 대한 의식적인 명상’이라고 했다. 신지학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설명이지만 통찰의 의미는 같다고 본다. 진리는 모두의 지향점이지만 서로의 여정은 다르다. 이 다름을 수긍하지 않는다면 몬드리안의 조형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그는 ‘진리는 모든 것 안에서 다르게 나타나며 모든 사람들에게서 다르게 나타난다’고 했다. 진실로 다양함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할 때 비로소 객관적 시각도 획득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세분화에 세분화를 거듭하는 세계, 수많은 상황,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개인 그리고 집단, 이 수많은 경우들은 오히려 다양함을 거부하며 생존에 목숨을 건다. 같아야 함을 요구하는 사회는 객관적인 판단이 작동되지 않는 병든 사회이다. 은연중 강요되는 주관적인 개인성은 공공의 객관화를 막는다. 몬드리안은 이를 미성숙으로 여겼다. 끝없이 형태를 창조하는 건 개인성의 발로이다. 여기에서 형태란 어떤 크기를 가진 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고려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의 평형을 이루는 게 몬드리안의 목표였음을 참고하면 그가 의식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세계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알다시피 관계란 상대적인 것이다. 객관성이란 주관성 없이 불가능하고, 개인 없이 집단은 성립될 수 없다. 즉 무언가의 존재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 덕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몬드리안이 이원론을 호출한 건 당연한데 회화의 요소인 형태와 색채 역시 그에 준한 대립된 존재가 서로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이원론은 단일화를 위한 바탕이다. 순수한 단일성, 곧 평형 상태를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림 A


그림 B


그림 A와 B는 각각 1929년과 1931의 작품이다. 색의 구성이라는 나름의 제목을 갖고 있지만 삭제하고 감상하기로 한다. 몬드리안이 제시한 평형 상태를 공감하기 위하여 그림 자체만 바라볼 것을 추천한다. 특별히 그의 이론을 자각하지 않아도 절제된 구도와 완벽에 가까운 균형감은 우리를 무감정으로 이끈다. 슬픔, 기쁨, 격정, 갈등, 불안, 혼돈 등 세상의 모든 감정을 평정한 화면을 조금 보태서 ‘무아지경’이라고 하면 과한 걸까? 



구성 연구, 1940-41



많은 사람들이 몬드리안의 그림을 자를 대고 선을 긋고, 그 안을 단색으로 칠한 단조로운 그림으로 여긴다. 교과서에 나온 그림이었기에 익숙한 그림은 쉬워 보이고, 그림으로 인정할 수 없는 그림이었는데 실상 흉내 내려면 베끼기도 어려운 힘듦을 경험했으리라. 


<구성 연구>는 몬드리안이 하나의 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이 필요했는지 알게 한다. 똑바로 쭉 뻗은 직선 역시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자’를 사용한 흔적은 없어 보인다. 수많은 회로를 거쳐 그의 직감으로 선택된 선과 어떤 색도 혼합되지 않은 빨강, 노랑, 파랑 그리고 하양과 검정이 그의 금욕적인 삶과 닮았다. 


몬드리안이 그랬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시각과 조화를 이룬 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예술도 따지고 보면 삶에 관계하는 거라고. 정확히 말해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예술은 기분 좋게 하거나 멋있게 보이기 위한 욕구, 또는 화려한 장식 등 때문에 본래의 길을 벗어나 타락하고 말 거라는 경고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예술은 그 사회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저울이다. 내가 사는 세상의 예술은 무엇을 어떤 모습으로 펼치며 어떤 지향점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가. 나의 관심은 어디로 기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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