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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Sep 19. 2022

파울 클레의 스쳐가는 이미지와 경험의 흐름

음악을 듣거나 문학 작품을 탐독하려면 요구되는 시간에 순응해야 한다. 아무리 빨리 듣거나 읽는다고 가정해도 절대적으로 감수해야 할 시간 요소가 있다. 그러나 회화 작품은 이만 못하다. 그림 감상에 할애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게다가 그것은 숨은 그림 찾기, 낯익은 형상에 대한 강박이라도 있는 듯 대상 찾기에 급급하다. 그래야 이것은 ‘무슨 그림’이라고 개운하게 결론지을 수 있기에 그런가, 아무튼 알아볼 수 없는 못된 그림은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건 우리가 주입식 교육만 받은 탓일까? 정답 맞히기에 사활을 걸며 청소년기를 보내는 탓일?  


클레는"화가는 스쳐가는 이미지와 경험의 흐름에 질서를 부여한다"라고 했다. 그림 안에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찾아볼 건더기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화가가 얼마나 광범위한 세계를 품고 있는지, 어떤 차원의 세계를 전개하는지, 무엇을 응축시키고 있는지 등등 그들의 특별한 감각에 최소한의 노크를 시도하기 바란다. 화가는 그림을 통하여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그림 앞에 서 있다는 건 적어도 화가의 사연에 내 이야기를 섞어 보겠다는 의지의 신호가 아닌지. 


클레의 그림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선의 유희, 낙서 같은 끄적임이다. 여기에 드리워진 가벼운 채색, 균등한 면 분할, 구도 등 담담한 배치와 나열이 이어진다. 흥분, 갈등, 불안, 기쁨, 환호 등의 감정은 저만치 뒤로 밀려난 듯 격정적이거나 힘 있는 추진력은 없다. 대신 잔잔한 파동이 이는 감성이 화폭에 가득하다. 덕분에 미세한 변화에도 언제든 분위기는 바뀔 태세이다. 그래서인지 클레의 그림은 때때로 온실 속의 화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클레에게 수집되는 그림 소재는 그의 활동 반경을 상상하게 할 정도로 주변 동네, 길, 인물, 나무, 식물 등 일상과 밀접하다.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표현과 소재 때문인지 클레의 그림을 어린애 그림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클레의 생전에도 있었나 보다. 그는 1924년 독일 예나 미술관(Jenaer Kunstverein)에서 개최된 전시회 개막 강연에서 그런 평가는 억지스러운 거라며 그 연유가 자신의 선 작업 때문일 거라고 해명한다. 


“나는 선으로서 대상에 드리워진 표상에 도달하려고 시도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그릴 때 ‘선’ 요소의 순수한 표현에 심혈을 기울이는 거지요. 만일 내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를 원했다면 곤혹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선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순수한 요소로 이루어진 표현은 어림없는 일이고, 그 결과 알아볼 수 없는 모호한 그림만 남게 됩니다. 어쨌든 나는 있는 그대로 옮기는 표현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상태,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있을 수 있는 존재’라,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는데 현대 예술의 길은 이를 통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온다.  클레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세세한 조각들을 통합하여 종합 선물세트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야로부터 흩어지는 시각의 차원, 회화를 구성하는 선, 명도, 색채라는 표현 매체의 차원, 이 외에 세계를 움직이는 여러 가지 차원들을 수집하고, 이 모두를 통폐합시켜 그의 시각으로 편성하고 배열한다. 클레는 이 또한 나름의 특정한 차원을 여는 일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연 형태의 변형은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계산하는 노인, 1929


<계산하는 노인>은 다행스럽게 제목에 맞는 형상이 있어서 고민 없이 누구나 다가갈 수 있다. 거듭된 수평선 사이로 묘하게 어우러진 노인의 형상이 관람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이러저러한 연상을 선사한다. 실상 윤곽선은 단박에 그어진 것처럼 쉬워 보이고, 자유롭고, 순진하다. 바탕의 선과 이미지의 선은 서로를 도모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노인의 손가락과 표정에 시선이 멈춘다면 선의 움직임 때문일 거다. 


선 하나에 기대어 이토록 명료함에 도달하는 클레의 관찰력이 경이롭다. 이렇듯 형상이 남아 있어 추상화다, 아니다,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를 추상화가로 꼽는 이유는 그의 직관적 표현 때문이다. 그는 이미지의 연상작용이 적절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의도를 명확히 시사할 수 있다면 운 좋게 들어맞는, 구성이라고 했다. 이러한 전개는 클레가 문제의 핵심을 어떤 대상의 여부가 아니라 특정한 순간에 비치는 대상의 모습과 성격이라고 판단했기에 가능하다. 또한 예술가라면 세상을 향한 대중의 안목을 넓혀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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