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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Sep 23. 2022

클레의 자연 연구

자연은 모든 현상을 수집하기도 하지만 관통하여 지나가도록 놓아둔다. 그래서 자연의 모습은 항상 그곳에 있지만 동시에 그곳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바람이 불어와 흩어지거나 소리도 내지 않고 빈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공기처럼 자연은 유유히 움직인다. 이러한 자연을 연구하지 않고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예술의 영감, 재료, 방법 등 모든 것이 자연으로부터 채득 된다는 사실은 감상자에도 유의미한 일이다. 이쯤에서 자연과의 친밀도가 예술적 감각에 기여한다는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지지한다면 나의 억지일까? 


클레에게 자연은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내면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자연을 인지한다는 건 생명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창조 작업의 일환이었다. 자연이 완성해 놓은 형태들을 투시하듯 살피고 꿰뚫어 보는 과정에서 그의 시야는 현재에서 과거로 확장되었고, 이는 창조의 이미지를 소환하기에 이른다. 생소한 용어처럼 다가오는 창조의 이미지란 현재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자연이 지금 완성해 놓은 이미지가 아닌 창조 자체의 구사력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이렇듯 클레는 현재를 통하여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자연의 창세기를 투영하며 그 행위의 영원성에 기대어 현재의 형태가 보여주는 세계가 유일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을 모두 담아내는 것도 아니라는 유연함에 도달한다. 사물은 확장되고 다양한 의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 모습은 어제의 것이고, 오늘은 모순 덩어리로 비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클레는 우리에게 예술가라는 직분이 생의 규율, 법칙, 종속관계 등을 지배하는 생명의 원천을 깨닫고 표현하는 일임을 환기시키려는 것일까? 그는 형태에 투영된 시간과 깊이, 대상의 인과 관계와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동적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투신했다. 


이 여정에서 그가 제시한 또 하나의 문제, 그것은 가시성에 대한 논지로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는 전 우주의 가시적인 것에서 분리된 한 조각의 일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즉 대상은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드러내지 않으며 그 안에는 감춰진 진실이 있기 마련이라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앞서 말한 유연함과 일맥상통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표현 가능한 유일의 세계가 아니므로 화가의 자의적인 형태 변형은 필수적이기 전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예술이란 외관상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안내, 자연의 재탄생에 관한 해설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클레의 말마따나 “화가는 철학자가 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철학자”가 되어야 하나보다. 화가는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그의 부연 설명이 새삼스러운 대목이다. 


쓰리 하우스, 1922.


<쓰리 하우스>는 색의 무게와 넓이가 균형을 유지하며 이미지의 구체화를 돕는다. 다채로운 색 대신 한 가지 색감이 주류를 이루며 화면의 질서를 편성한다. 덕분에 명도에게 윤곽, 구도, 내용 등 모두를 아우르는 진두 지휘권이 맡겨진다. 물결과 같은 영롱한 수평선, 숲이 펼쳐질 것만 같은 뒷마당, 과하지 않은 집들, 하늘의 동그라미까지, 모두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흡족함이 순진 무구한 충만함으로 안내한다. 


명료한 기하학적인 도상들은 고집스럽지 않다. 경계가 희미한 것도 아닌데 이 도상들은 무언가 흘려보내기도, 반대로 흘려 들여오기도 한다. 밀착되지도, 거리를 두지도 않는 관계의 표상이 바로 이것 아닐까? 관계의 평화 때문에 <쓰리 하우스>의 감동은 잔잔하다. 게다가 푸른 녹색 조의 색감이 들뜨지도 가라앉을 수도 없는 감정의 폭을 조절하며 전체를 평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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