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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Oct 12. 2022

파울 클레의 작은 정원 유령

회화 요소는 함부로 화폭 위를 누비지 않는다. 모든 삶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균형을 위한 장치이며, 존재를 위해 지켜져야 할 최소의 예의이다. 회화에서 균형은 감정에 관여한다. 우리에게는 균형에 대한 유전자가 있는지 불균형이 반갑지 않고 불편하다. 그래서 화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갈등과 불안을 표현한다. 


사계절을 가진 우리는 자연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가까이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환경이라는 구조물은 생명을 품기도 하지만 구조 정리도 서슴지 않는다. 균형을 이루려는 우주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기온 편차가 대략 영하 15도에서 영상 35도, 이 땅의 삶은 무려 50도의 날씨 변화를 감당해야 한다. 평생 업혀 다닌 사람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진리가 이곳에 새겨진다. 


회화 요소가 적재적소에 놓인다는 건 화가가 자신의 의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이제 회화 요소들이 이야기꾼이 되어 재잘대기 시작한다. 선의 조화, 명도의 배합에 따른 효과, 그리고 여기에 딱 맞는 색의 반향이 어우러져 모든 표현이 일심동체가 되어 빛을 발한다. 


선은 각으로 제 성질을 나타낸다. 수평선과 기울어진 선의 감정은 분명히 다르다. 각진 선과 지그재그 선의 움직임도 제각기 특성을 가진다. 그런데 이들의 성격을 명료하게 하는 건 서로 상반된 것끼리 만났을 때이다. 선형적인 형태에서도 굳게 결합된 선과 산만하게 흐트러진 선의 형태는 대조를 이루며 서로의 존재를 선명하게 한다. 


이 대비의 표현에 유난히 감탄한 이가 클레다. 클레와 선의 친밀도는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남다르다. 선의 끄적거림 때문에 어린애 그림 같다는 평까지 받을 정도로 그는 선으로 표현하기를 즐겼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삐뚤빼뚤한 선을 보고 있노라면 선 하나하나에 실린 그의 감동과 섬세함에 갖가지 상상이 실려 온다. 


클레는 명도를 해석할 때도 대비를 활용한다. 그는 검정에서 하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명도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는 건 성숙되어 가는 힘의 표출이라고 봤다. 반면 밝은 쪽이나 어두운 쪽 또는 회색 부근의 중간 명도만 제한적으로 쓰이면 과다하거나 과소한 명도에 비해 약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이건 당연한 언급 아닌지, 때때로 의구심이 침투하지만 익숙한 평범함을 수집 정리하여 개념화한다는 건 분명히 다른 문제이고 능력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대체로 진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고 사소함에 있다. 이른바 '신상'을 좋아하는 시대에 구태는 새로움에 치이는 듯해도 그렇지 않음을 레트로라는 유행이 증명한다. 세상은 새로움만으로 채울 수 없다. 현재의 상태, 있는 그대로가 중요하다는 건 추상화가들에게 각별하다. 만약 색이나 선을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봐주지 않았다면 이들은 끝내 무언가를 보조하는 역할 속에 숨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추상은 객관적인 눈으로 투시해 보는 방법을 일러준다. 우리가 보는 것이 어디 그림뿐이랴. 


두 가지 방법, 1932.


<두 가지 방법>은 목적이 하나임을 암시한다. 클레는 좌우에 화살표를 그려 놓았다. 그는 종종 기호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목적으로 초대한다. 그곳은 우리의 시선이 모이는 곳, 밝음이다. 몇 가지 단계로 정돈된 명도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을 정도로 투명하다. 마주한 화살표는 결코 부딪칠 일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적절한 곳에 조성된 수평선은 비켜나가도록 설계되어 있고, 면은 점차 확장되면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덩어리, 공동체이다. 


색은 다재다능한 가능성의 보고이다. 클레는 색이란 자체의 특성은 물론이고 명도까지 품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빨강 배경에 빨강을 사용하면 색은 명도로 자신의 기능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색에는 과잉에서 결핍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효력이 산재되어 있다.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변화, 보색의 대비, 색상환의 다채로움, 클레는 이 모두를 색의 웅장한 교향악에 비교했다. 색에는 사소한 음영의 차이부터 다양한 조망까지 가능하다는 감탄이다. 


작은 정원 유령, 1929.


 <작은 정원 유령>에는 클레의 정서가 담뿍하다. 앙증맞은 캐릭터의 천진함에 투명한 색감과 엷은 색조가 가세한다. 화면 위의 빨강은 해일까, 햇살의 교차점이 사선을 이루며 방사된다. 타원의 노랑은 노랑답지 않게 친절하다. 투명한 셀로판 종이를 덧대 놓은 듯 무엇이든 무사통과시키며 노랑의 가벼움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다리와 발의 움직임은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화사한 색채 덕택에 이 걸음걸이는 활짝 꽃이 핀 곳을 찾아가는 혹은 꽃을 피우기 위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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