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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Oct 17. 2022

파울 클레 <밤의 바위>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에 대한 클레의 생각은 아주 흥미롭다. 그의 관점은 대략 이러하다. 회화에서 형태의 문제는 언제나 주된 논쟁 거리인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가 표명한 형태는 자연과 닮아야 한다는 궁극의 목표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상주의는 인상을 표현하려는 욕구 때문에 본다는 광학적인 문제에 집착한다. 이들에게 구조에 대한 관심은 아예 없다.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의 도돌이표이다. 표현 방법에 있어서 구조의 문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주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라는게 클레의 지적이다.


하지만 입체주의를 대하는 클레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입체파가 회화 형태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이유에서이다. 입체주의자들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형태를 기존의 모습과 다른 각도로 보고 해석하게 하였고, 이내 형태를 분해하고 소분하게 하였다. 이러한 입체파의 궤적은 기존의 가치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에 대한 클레의 입장은 입체주의자들의 덕목이 조형적 사고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것이다.


입체주의가 회화에 새로운 장을 열은 선지자임은 분명하다. 이 마당에 세잔느를 지나칠 수 없으니 한 가지 짚고 가기로 하자. 그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형태와 시점에 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그의 정물화는 탁자에서 쏟아져 나올 듯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다. 실제로 그런 구도로 정물이 놓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는 자연적인 상태와 회화를 통해 보는 상태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잔느는 형태를 관찰하기 좋은 시점을 숙고하여 선택한다. 구도 역시 형태가 잘 보이도록 산정하여 결정한다. 자신이 관찰한 형태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었고, 자신이 느낀 최고치의 형태를 묘사하고 싶었으리라. 이러한 형태에 대한 관심이 세계를 바라보는 구조의 전환으로 이어지는데 곧 세상은 육면체, 공, 원뿔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세잔느가 걸어 놓은 시동에 가속페달을 밟은 건 입체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형태마다 제각각 시점을 부여하여 소실점과 같은 종합적인 시점의 체계를 치워버리는가 하면, 형태를 마음껏 부수고 조립하기에 이른다.  


클레가 입체파를 매력적으로 평가한 데는 자유롭게 호흡하는 형태 때문이다.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형태, 강요당하지 않는 형태에 대한 이상은 현대 미술의 공통 관심사이다.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면 자유로운 것일까? 전위적인 표현이 가세하면 자유로 가는 지름길인가?


이에 대한 클레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것은 형태가 제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쉽고 단순한 해법인지. 하지만 제모습을 찾으려는 일, 발견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토록 끊임없이 관찰하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선택된 것이 추상화가들의 동그라미, 네모, 세모, 끄적거림 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


밤의 바위, 1939.


<밤의 바위>에서 푸른색조는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사색에 잠기게 한다. ‘밤’이라기보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녘에 가까운 푸르름은 경건하다. 알록달록한 우리들의 꿈은 <밤의 바위>에 내려놓기로 한다. 블랙홀이라도 있는 것처럼 세상의 떠들썩한 소리는 흡입되어 버리고, 그 덕에 원초적인 본래의 상태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밤의 바위>는 클레의 임종 한 해 전에 완성됐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작업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클레의 선에는 위태로움이 있다. 어설픔이라고 표현해도 될 그의 선에서 조금 흔들리거나 삐뚤어져도 된다는 암묵적인 너그러움과 언제든 변형을 수용하겠다는 용기를 읽어 낸다. 조급할 이유가 없는 지점에서 우리는 종종 급하게 서두르고, 세상의 기준점에 나를 맞추려 애쓴다. 그런 내 모습이 조각보가 되어 <밤의 바위>에 오버랩된다.


어떤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화폭의 균등한 배분과 구획 정리는 클레가 얼마나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말해준다. 그가 전하는 감정의 폭은 제한적이다. 그는 극으로 치닫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화폭에서만큼은 평화가 유지되고 지속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레는 역사적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았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징집된 것은 물론이고 절친한 친구 마케를 잃었다. 이후 나치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시대의 혼란을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다.


로즈 가든, 1920.


<로즈가든>은 붉게 물든 장미가 마을의 가로등이 되어 빛나고 있는 풍경이다. 오밀조밀 어울려 있는 집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지탱해 준다. 대략 비슷한 넓이를 가진 조각들이 옆으로 퍼지면서 나름의 수평선을 조직하고, 이것은 아늑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조용하지만 율동이 있는 마을은 정겨움이 넘친다. 이 또한 적절한 분배에서 비롯된 감정이리라. 클레는 누구에게도 과다한 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는 대체로 비슷한 비례로 대등하게 나누어 구획화하고 색, 선, 형태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클레는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는 통상적인 반응에 예술은 과학이 아님을 강조했다. 예술은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현상을 관찰해서 그대로 묘사해야 하는 과학이 아니다. 두 분야의 차이는 수행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과학은 집단적인 연구와 노력이 한 발 한 발 쌓여서 이루어내는 업적이지만 예술은 오히려 그와 반대이다. 예술은 개별적인 표현, 방법, 시각에 의해서 서로 다른 세계를 깨우고 불러일으키는 창조 행위임을 클레는 강조한다.  


이러한 클레의 생각에 비추어 보면 ‘닮은 모습’만 찾는 영혼은 과학적인 실증의 규칙을 예술에 가지고 와서 왜 인식이 안되냐고 따져 묻는 격이다. 또다시 소통의 문제가 고질적인 복병처럼 버티고 있다는 한계점에 도달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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