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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Oct 22. 2022

말레비치, 존재의 시초를 말하다.

사람은 개성과 신념으로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시대의 정치 경제가 삶의 형식을 결정하며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흔들어 놓아도 끝끝내 점령당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토가 있다. 거창한 철학적 사관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나를 입증하는 나의 이야기, 그 입김 덕에 스스로를 꼿꼿이 일으켜 세우며 나름의 문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아간다. 이처럼 신념은 내면의 갑옷이 되어 내가 나로 살아가도록 언제나 나를 지지하며 수호한다. 


신념을 내면에 간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역으로 자신의 신념에게 조당한다. 이런 이는 주체할 수 없는 사명감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하기까지 한다. 누가 보아도 그건 신념을 위장한 욕구일 뿐이다. 불행은 분별력을 상실한 무지에 있다. 진리의 무게감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화가들의 이야기는 신념의 서사이다. 이는 역사와 같아서 시대의 절절한 요구와 함께한다. 1910년대의 러시아 예술 무대에서는 선구자가 되고 싶은 이가 여럿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을 전후로 사회 갈등이 촘촘하게 무리 지어 부딪치고 있을 때 러시아의 전위 예술가들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191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미래주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가 상연됐다. 여기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무대 장치를 맡게 되는데, 이 작업을 통해 절대주의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자서전에 “의식하지 않고 한 일이 지금에 이르러 특별한 결실을 가져왔다.”라고 밝혔듯이 오페라 무대 장식은 그의 인생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은 사각형>, 다시 말해서 무대막 스케치에서 발견된 검은 사각 형태이다.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 장치 스케치, 1913.



검은 절대주의 사각형, 1915.


말레비치가 공개한 흰 바탕 속 검은 평면은 당시 회화의 추상적 접근을 하나로 모아 놓은 듯 논리적 완결성을 향해 달려간다. 검은 사각형의 이론적 해석은 작품이 발표된 후 일 년이 지나서 이루어지는데 이로써 말레비치는 자신이 주창한 절대주의의 조형적 선언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정사각형에 부여된 ‘형태의 영’이라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개념 정의이다. 


제로 상태란 아무것도 ‘없음’에서 모든 것이 ‘있음’을 향해 뻗어 나간다는 것을 전제하거나 이러한 전개의 암시도 포괄한다. 말레비치가 말한 제로 상태의 사각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각형은 모든 것이 가능한 존재의 시초, 시발점임을 자처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각형은 ‘형태의 영’으로서 절대자와 동일선상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표방하기에 이르며 절대주의라는 명칭을 갖게 된다. 


입체주의의 심화가 이루어낸 편편한 평면에 대한 관심은 기호가 되어 세력화되고, 활동 반경을 확장해 나아간다. 평면의 발견, 이것이야말로 현대미술의 신대륙이 아닐까?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인류 역사이래 지상 최대의 과제인양 마무리될 줄 모르고 지속되는데 예술에서 새로움이란 각성이다. 그동안 무심했던 것에 대한 깨달음, 일상적인 것에서 발굴되는 특별함, 어떤 대상을 일정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등등에서 얻어 내는 새로움이기에 그렇다. 


말레비치의 사각형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 평면의 회화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것은 새로움이란 언제나 구태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사각형이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이전에 누구도 실행하지 못한 신천지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것에 길들여진 사고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유연한 사고는 앎의 폭과 비례한다. 


1915년 세상에 나타난 <검은 사각형>은 유화 물감의 갈라짐을 그대로 드러내며 세월의 흔적까지 안고 있다. 묵직한 검은 사각형은 벽처럼 앞을 가로막으며 숨을 멎게 한다. 이 사각형은 모두에게 ‘멈춤’이라는 명령을 과감하게 외친다. 모두에게 ‘새로고침’이라는 신호가 말레비치의 주장대로 회화에서 대상과의 완전한 결별로 전달된다. 비대상성이라는 관념적인 세계, 즉 대상을 품지 않는 회화로 나아가려는 것이고, 이를 위해 형태는 無에서 그의 방식으로 거듭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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