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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Oct 25. 2022

말레비치, 완전을 꿈꾸며...

구약 성서의 창세기는 천지창조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 안의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 대체 무엇을 다 이루신 걸까? 과연 다 이루어 놓은 세상을 하사 받은 인간은 그 은혜에 취해 제 갈 길을 잃어도 되는 걸까? 인류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이 제 멋대로 해석된 결과 수많은 갈래를 낳으며 갈등의 싹을 틔운다. 


기독교 사상은 예수를 신격화하기에만 급급하여 예수가 시대의 혁명가였고 실천가였음을 망각하고 싶어 한다. 예수의 휴머니즘을 잊은 이들은 추상적 용어만 늘어놓는다. 세상 좋은 말은 다 갖다 쓰지만 결코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이상한 나라의 권력자는 관념적 가치를 방패 삼아 누군가의 현실을 기만하거나 도둑질한다. 


20세기 초 사상가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초월적 가치의 허구성을 고발했다. 신 앞에 평등을 외치지만 실상은 개별적 특성이나 현실을 부정하는 위선이라는 것, 신의 절대성은 그 외의 것을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억압이라는 것, 이러한 니체의 도전은 기존의 전통과 덕목에 넌덜머리를 느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러한 사상을 흡수한 러시아의 미래주의는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삶의 새로운 인간상을 만든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주제인 ‘새로운 인간의 미래주의적 유토피아’는 니체의 초인 사상에 바탕을 둔다. 초인이란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과 제한을 극복한 이상적인 인간이다.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은 절대자로서 신을 대신한다. 이러한 주장에 관심을 둔 미래주의자들은 나름의 초인을 설정한다. 그것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유토피아, ‘자아’와 마찬가지로 ‘비자아’를 인식하고 두 진영의 합일을 이룬 인간상, 실제 시공간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정신의 힘으로 시공간을 조종하는 인간상이다. 


미래주의가 새로운 인간상으로 제시한 완전성은 말레비치에게 ‘비대상성’으로 환원된다. 그에게 어제의 예술과 자신이 주창한 예술을 구분 짓는 일은 중요했기에 자신의 새로운 개념을 부각하며 확실한 분계선을 긋고자 했는데 그가 내세운 새로움이란 ‘비대상성’이다. 이것은 절대주의 조형 이론의 주축으로써 <검은 사각형>으로 구체화된다. 즉, 대상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의 종말을 이야기하며 사각형에 모든 표현의 가능성을 부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사각형은 절대적인 조형 상태, 순수한 창작의 첫걸음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 


말레비치는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 ‘모든 것’과 ‘무無’의 관념을 구현한다고 했다. 이에 대한 그의 부연 설명은 이러하다. 하양은 무의 황량함과 무한한 공간의 은유이며 모든 색의 스펙트럼을 보유한 색이고, 반면 검정은 색의 최소화를 상징하며 모든 색을 흡수하는 색으로 색에 포함시킬 수 없는 비색非色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 형태, 절대주의의 세포, 절대주의적 방법을 구축하는 핵심이다. 즉 정사각형의 회전으로 원이 형성되고, 정사각형의 이동으로 십자 형태를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각형이 주축이 되어 형태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 


검은 정사각형 외에도 두 가지 기본적인 절대주의 정사각형, 즉 흰 정사각형과 빨간 정사각형이 있다. 이는 말레비치가 정의한 예술철학의 삼단 구조인데 그의 말마따나 “절대주의는 정사각형의 세 단계, 즉 검은 정사각형, 붉은 정사각형, 흰 정사각형으로, 검은 시대, 색채 시대, 하얀 시대로 나뉜다.” 이로써 그의 특정한 세계관과 구조의 정립을 엿볼 수 있는데 검은 정사각형은 최소화의 표현으로, 붉은 정사각형은 혁명의 신호로, 흰 정사각형은 순수한 행위를 담보한다. 



붉은 사각형(농노 여인의 2차원 회화 리얼리즘), 1915.




흰색 위의 흰색, 1918.



<붉은 정사각형>은 형태와 색의 상호관계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절대주의 조형 이론에서 색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형태의 단순화와 순수한 행위를 지향했기 때문에 검정은 하양으로, 하양은 검정으로 직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흰색은 심연, 무한한 공간을 대변하는 것이니 말레비치의 고백은 이러하다. “나는 색채의 한계라는 푸른 차양을 찢어버리고 흰색을 향해 나왔다. (…) 헤엄쳐라! 당신 앞에는 하얀 자유로운 심연, 무한함이 있으니.”


<흰색 위의 흰색>에서 사각형은 앞선 본 검은 사각형과 붉은 사각형과 달리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자유다. 우리에게 부여된 태초의 자유가 여기에 있으니 그 권리를 한껏 누려보라는 말레비치의 속삭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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