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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Oct 28. 2022

말레비치의 색다른 유토피아

유토피아를 꿈꾸는 건 인간의 숙명일까? 우리는 삶이라는 녹록지 않은 현실에 대적할 위로가 필요하고,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이상이라고 믿는 생존 법칙이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한 순간 기꺼이 도피처가 되어줄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백배 활용할 줄 아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세상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알고 접근한다. 여우처럼, 또 뱀처럼 다가온 이들이 리더가 되면 그 공동체의 파산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아쉽게도 그 값을 치러야 하는 이는 따로 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인 거다. 


추상화가들의 공통된 과제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유토피아’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시대의 선구자답게 그들이 설계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했다. 절대주의의 검은 사각형도 이에 속한다. 러시아 구축주의자 로드첸코는 「구축주의자 선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단순하게 평면을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그것을 깨달은 자가 나타났고, 그는 단지 사각형을 보여주었다. 이는 평면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검은 정사각형은 절대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예술 전반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당시 예술가들에게 수수께끼와 같은 마력을 지니고 다가온 검은 정사각형은 절대주의와 거리가 먼 샤과 칸딘스키의 그림에서도 발견된다. 이들은 절대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적대적이었지만 검은 정사각형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검은 정사각형을 평면의 정수로 여겼고, 이 안에 드리워진 무한한 창조력을 읽었고, 이와 함께 탐구해 나아갈 방향도 알아차렸다. 



네 개의 사각형, 1915.



<네 개의 사각형>은 회화의 창세기처럼 다가온다. 흰색은 모든 색을 뱉어 내고, 검은색은 모든 색을 삼킨다. 압도적인 균형은 최상의 평평함을 전제로 한다. 모든 게 극과 극을 오가며 확장과 팽창을 반복하지만 서로의 견제가 시시콜콜 방해하거나 감시하기 때문에 정해진 울타리는 확고하게 유지된다. 이들의 폐쇄적이며 권위적인 시스템은 무조건 복종을 요구한다. 긴장이 시종일관 가실 줄을 모르고 서성인다. 


정사각형은 모든 것의 근원과 시초, 탄생의 비밀을 설파하지만 모두는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퇴장할 수밖에 없다. 주장이 아무리 굳건해도 진화는 필수적인 법이다. 절대주의 운동은 메아리가 되어 구축주의, 현대 건축, 그래픽에 영감을 전하며 사명을 다 한다. 




용해 중인 노란색 비행기, 1918.



<용해 중인 노란색 비행기>의 신선함이 그동안의 검은 정사각형에 상쾌한 기분 전환을 일으킨다. 날렵한 제비 꼬리는 아니지만 어슷하게 빗나간 모서리가 상황의 전환을 불러온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사각형은 이조차 보존되지 않고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말레비치는 무슨 생각으로 한 편을 지워버렸을까? 


이 시기의 말레비치는 예술이란 사고, 지식, 실용성 등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행위’ 자체라고 역설했다. “회화의 본질은 대상성이 짙은 실용적 현실, 미적 현실, 윤리적 현실과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본질은 행위의 비대상성이다.” 쉽게 말해서 그동안의 지침은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역사를 쓰겠다는 말이다. 


녹아내리고 있는 노랑은 반대로 생성되는 노랑이기도하다. 노랑이 갖는 생기발랄함은 역동성에 에너지를 보급한다. 무언가 계획되고 이에 따라 움직일 거라는 신호이다. 이제 사각형은 공간 속으로 들어가 작은 사각형으로의 분할되어 재배치되며 입체와 공간까지 섭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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