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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Nov 08. 2022

절대주의의 진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20세기와 함께 찾아온 정령 같다. 모두는 새로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었다.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출현과 달라진 삶의 형식에 적응해야 했던 시대의 조류는 오늘날 우리에게 수많은 이즘ism으로 분주했던 삶의 흔적을 전한다. 새롭지 않으면 주목받을 수 없다는 위기감은 이때부터 생긴 걸까? 


예술가들은 앞다퉈 새로운 형태를 속출해 냈다. 이들의 목표는 다양했지만 종착역은 서로 엇비슷했다. 모두가 창조의 근원을 찾아 고군분투했고, 미래를 직감하고 포괄하는 형태를 선보이려 했다. 말레비치는 “예술가는 자신의 붓으로 기호를 만든다.”라고 말했다. 이 시대에 화가로 산다는 것은 선구자임을 자처해야 하는 녹록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이들의 어깨에는 신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논리를 세상에 이해시켜야 하는 과제가 올려져 있었다. 이 또한 시대의 자화상이다. 아방가르드라는 명칭은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기호는 많은 의미와 갈래를 하나로 모으는 함축성에 기반을 두며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말레비치가 주창한 ‘비대상성’도 그의 입장을 기호화한 것으로써 모든 개체의 와해를 전한다. 개별적인 대상은 지워버리고 대신 모두를 하나로 결집시켜 완벽한 형태를 만들겠다는 심산이다. 심지어 정신과 물질을 논하는 이원론도 대상을 의식해야만 전개될 수 있는 왜곡된 개념으로 봤으니 대상을 대하는 그의 의지가 결연하기까지 하다. 


그에게 대상은 세계 구조의 진정한 표상을 볼 수 없게 하는 방해꾼이다. 대상은 인식이나 평가 등을 동반하여 나름의 감정을 흩뿌린다. 이는 말레비치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다. 당연히 대상은 제거되어야 하고, 비대상의 순수함은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말레비치는 창조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지식과 판단도 대상성에 기반을 둔다고 믿었다.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형식과 정보 등을 거부하고 탈출할 것을 종용한다. 결국 무념무상과 같은 순수 행위만 남겨지면서 ‘창조는 순수한 행위 자체이다’라는 논리에 귀착된다. 이러한 까닭 때문인지 그는 ‘충동’에 엄청난 점수를 주었다. 


말레비치는 우리가 삶이라고 여기는 발원과 동기가 다양한 형태의 충동에서 시작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연유에서 충동이야말로 순수한 실제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충동은 인식, 증명, 수치, 지침, 설명 등으로 나타낼 수 없는 해방 자체라는 게 말레비치의 해명이다. 이는 절대적인 완성을 향한 그의 꿈이 결국 무無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한다. 


어떤 상태를 갖지 않은 존재, 이 궤변스러운 존재에 대한 고민은 그의 편지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 인식! (…) 이 도구가 말이야, 쉼 없이 펼쳐놓는데, 제일 중요한 건 무無를 펼친다는 거지.” 이렇듯 관념적인 창조 사업을 펼쳐 나가기에 사각형의 발견은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절대주의적 구성, 1915.


<절대주의적 구성>에서는 태초의 적막함에 일렁임이 감지된다. 역동의 탄생이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고요를 흔들어 깨운다. 묵직한 힘으로 모든 것을 쓸어 담았던 정사각형은 여타의 형상을 낳으며 뒤로 물러나기로 한다. 직사각형은 고심의 흔적을 안고 또 다른 사각형을 발산한다. 모두의 새로운 크기와 자리는 쉽게 마련되지 않았으리라. 근원과 파생이라는 심오한 법칙까지 끌어들이는 파급력은 무언가 계획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다음 향방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이렇듯 말레비치는 절대주의의 기호, 검은 사각형에 역동의 숨을 불어넣기로 한다. 갇혀 있던 정적인 힘이 비등점을 지나 끓어 넘친 것인지 정사각형의 에너지가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절대주의의 진화가 시작된 거다. 정사각형의 다변화 그리고 평면에 드리워진 입체적 감각이 확장된다. 


이로 인하여 말레비치는 또 하나의 역동성을 이야기하는데 바로 관계의 에너지이다. 다시 말해서 형태에는 분명히 힘의 관계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으로 보면 평면은 수직과 수평의 힘이 관계한 결과물이다. 즉 힘의 운동이 상호작용하여 공간을 형성하고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논리이다. 


말레비치는 이를 기반으로 ‘절대주의의 축’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이 관점으로 보면 앞서 말한 평면은 수직과 수평의 힘이 축으로써 에너지를 행사한 게 된다. 즉 힘의 상호작용을 축으로 본 것이다. 축은 방향을 제시하므로 결과를 좌우하는 권한이 주어진다. 또 축은 회화의 기호로써 살아 있는 세계의 움직임을 응축시킨 매개체이다. 


이 두 가지 역할은 “주요 축을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형태와 공간과 시간이 회전한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3차원의 입체 위에 4차원의 영역이 얹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역동의 감각은 절대주의의 가공할 만한 수확물로 건축과 그래픽 디자인으로 뻗어 나가게 된다.  


절대주의, 1915.


위의 작품 <절대주의>의 정사각형은 검은색이 아니다. 양도된 힘, 에너지의 양상을 느끼게 하는 화면은 천천히 전도되고 변환되는 상태를 묘사한다. 운동의 방향과 힘의 흐름이 질서를 구축하며 세계를 장악한다. 


지극히 관념적인 말레비치의 논리는 처음부터 회화보다 철학에 가까운 사변적 이상이 아닌지. 살아 있는 상태, 이를 포착하여 묘사한다는 건 너무나 거대하고 무모한 시도가 아닌지. 이 모호한 세계는 무한의 세계로 대체되고, 그가 주장한 새로운 세계는 조형 예술로 전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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