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11월, 생 레미에 비가 내린다. 고흐는 이곳의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이듬해 5월 퇴원했으며, 7월 생을 마감했다. 고흐는 풍경 위에 선을 거침없이 내리꽂았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은 11월의 공기를 체감하게 한다. 비는 모두를 할퀴며 두드린다. 이곳은 갖가지 감정이 교차되는 곳, 누군가는 내면의 충돌을 이기지 못하여 격정을 향해 달려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한계치를 직관하며 지각한다.
세상 모든 것은 살아서 움직이고 부딪힌다. 여섯 살이 되어 놀이학교에 가야 하는 꼬마가 푸념하듯 혼잣말하는 게 들렸다. '난 정말로 집에 있고 싶은데...' 여섯 살 인생에도 근심 걱정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약한 존재일까? 겪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 어디서나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 예수는 그날 걱정은 그날로 족하다고 사람들을 다독이며 가르친다. 예수는 삶의 고달픔을 벌써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1순위인 건 당연하다.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어려움,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 경제적 난관, 어디 이뿐이랴. 심호흡이 필요한 삶의 굴곡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 것일까? 주어진 것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사방팔방으로 스스로를 치대는 것일까? 아니면 주어진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어서일까? 이 와중에 상상은 언제나 내 뒤에서 치근덕거리며 따라온다. 그것은 마치 여자를 꼬드기던 에덴동산의 뱀처럼 이런저런 경우와 광경을 펼쳐서 내보이기까지 하니 괴력을 지닌 가상 이상의 존재이다.
나도 모르게 슬쩍 일어나 내 약함을 거드리는 마음아!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지만, 그래서 살짝 귀 기울여줄까 동조할 기미를 내비치면 금세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내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마음아! 그건 안돼! 왜 좀 더 단호해지지 않는지... 왜 쉽게 동조하고 마는지...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