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주제에 걸맞게 생각을 포기하고 쓴다.
난 포기를 하지 않는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주어진 보기 중에서 선택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생기고
그것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주관식이라면 그런 걱정이 없다.
어차피 세상에 답은 존재하지 않는데, 굳이 무언가를 포기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닐까.
포기-기회
살다 보면 수많은 기회들이 찾아온다.
온전히 그것을 취할 때도 있고, 아쉽게 놓칠 때도 있다. 가끔은 기회가 찾아왔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친 때도 존재한다.
그러나 난 기회를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순간들 말고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란 것은 찾아올 틈이 없었다. 그저 내가 만들어 낸 당연한 순간들만 존재했다.
기회-회상
미래에 대한 상상보단 과거를 주로 회상한다. 미지의 대한 상상은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심만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미 지나가서 습득되어버린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세월이라는 작가가 각색한 과거는 어떤 이야기보다 아름답게 미화되어 있으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할 수 있다.
회상-상이
사람은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비슷한 것을 가끔은
'같다' 고 착각한다. 그 부분에서 비롯되는 오해들은 아주 얕은 만큼 잡아내기도 어렵다.
99프로가 비슷하니 1프로의 다른 점을 쉬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 1프로의 미약한 차이가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우리는 고통받는다.
하지만 쥐와 인간의 유전자가 99프로 같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고약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상이-이해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사물을, 타인을, 만물을, 나를.
아마 각자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범위가 있겠지만 나의 편견에 따르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할 수가 없다. 인간이란 결국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신을 기준으로 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통 누군가 울고 있으면 저 사람이 얼마나 슬픈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본인이 우는 순간들이 대체로 슬프기에 하는 생각인 것이다. 그 사람이 슬퍼서 우는지 미쳐서 우는지는 고려하지 못한다. 이해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불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이해-해탈
종교적 의미를 제쳐두고, 해탈이라는 것에 다다를 수 있다면 어떠할까?
모든 것을 깨닫고 벗어던질 수 있는 상태. 그 모든 것에는 나라는 자아마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도달한 이가 없기에(실제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이가 있다 해도 우리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상상이나 해봄직한 그것은, 아무런 짐작 조차 할 수가 없다. 행복한가 불행한가, 가득한가 공허한가, 번민하지 않는가, 모든 만물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가. 이 조차도 결국은 해탈하지 못한 인간의 뇌 속에서 나온 생각들이기에 그냥 판타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존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말이다.
해탈-탈선
단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의미는 어쩔 수 없겠다. 정해진 선로 위로만 달리는 기차는 탈선이라는 현상을 겪으면 사고라는 결과를 나타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사람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적용된다. 남들과 다른(굳이 따지자면 안 좋은 방향으로) 길을 걷는, 특히 어린 친구들에게 탈선이라는 표현은 결코 좋은 현상이라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정답이라 할 수 있는 선 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탈선 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탈선-선행
선행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행위 자체를 숭고함으로 포장해 버린 그것을 비난하는 순간, 역풍이 거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하여 그 모든 것을 막연하게 좋게 보는 것은 의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기심에서 발현된다. 내가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그것은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근본적으론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라는 것을 선행과 같은 선상에서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선행-행간
내가 느끼는 정말 재밌는 책이나 글을 보다 보면 여러 가지 화려한 수사문구나 기가 막힌 스토리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핵심은 적절한 행간의 존재이다. 하나의 사건을 100으로 봤을 때, 100 전부를 글로 표현하는 것보단 적당한 누락을 포함시키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그 공백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은 행간의 등장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 실제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든다.
행간-간사
날씨의 변화를 느낄 때, 사람이 간사하다는 표현을 가끔 한다. 추울 땐 따뜻하길 바랐지만, 더워지면 바로 추워지길 기대하는 심리. 그것이 어째서 간사하다는 말로 나타나는 걸까. 그저 결핍에 대한 솔직한 욕구일 뿐인데 말이다.
간사-사랑
인간이 존재한 이후로 사랑을 고민하지 않았던 시기는 없을 것 같다. 인류를 유지해 온 가장 커다란 무형의 개념인 감정. 수많은 문학가들이 끊임없이 그것을 표현하려 했고, 과학자들은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다. 단순한 호르몬의 작용, 보이지 않는 영혼의 교류. 극단에서 주장되지만 다행인 것은 둘 다 사랑은 했었다는 것.
사랑-앙심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 품어본 적 없는 마음이다. 내가 앙심을 품지 못했던 것은 그 반대되는 마음 또한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앙심-심공
불교의 핵심 개념 중 공(空)에 대해 예전부터 많은 생각을 한다. 비어있는 것을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것을 떠올리고 그것을 지우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공인 것은 인지할 수가 없다. 인지의 테두리 밖에만 있을 그것은 떠올리지 않아야만 인지할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싶다.
심공-공포
공포의 근원은 무지라고 생각한다. 무지에서 비롯된 예측 못할 모든 상황은 공포라는 감정으로 다가온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은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알고 있다면 대처를 할 수 있고 그것은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대할 수 있다.
공포-포기
아무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포기를 할 수가 없다. 무언가를 취했기에 따라오는 것.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기에 포기도 없다. 포기조차 포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