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들었어? 요 앞에 복권방 로또 1등 나왔대"
"맞아 부럽더라. 아, 내가 샀어야 하는데"
집에서 3분 거리인 카페에서 나온 대화다. 20년 지기 친구와 카페에서 친해진 단골누나, 우리는 종종 모여 수다를 떨곤 했다. 그날의 주제는 카페 앞 복권방에서 로또 1등 당첨이 나온 소식. 로또가 대화주제로 나오면 언제나 따라오는 '만약에'가 있다. 만약에 1등이 당첨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건물 집 차 같은 고가의 무언가를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직장을 때려치울까 말까, 혹은 사업을 시작한다는 사람도 있고 한 때는 비트코인에 올인을 하겠다는 의견도 자주 나왔었다. 그런 행복한 상상을 나누다 보면 한두 시간쯤이야 후딱 지나가니 적당한 대화주제이지 싶다. 즐거웠던 그날의 주제는 바로 다음 주, 한번 더 반복되었다.
"너네 집 앞 편의점서 로또 1등 또 나왔대"
"2주 연속 우리 동네에서 나왔네 대박이다"
여전히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로또 987회와 988회 1등 당첨은 100미터 정도 떨어진 복권방과 편의점서 나왔고 그 두 군데 모두 우리 집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한동네에서 1등이 2주 연속 당첨 된 것도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더 재밌는 것은 987회 1등이 당첨금을 결국 타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1년 이내로 찾아가지 않는 당첨금은 주인이 없어진다. 당시 1등 당첨금은 23억. 이 글은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23억에 대해 나만이 알고 있던 이야기다.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저녁 어둑한 시간. 사람들은 슬슬 패딩을 꺼내 입었지만, 난 보온을 기대할 수 없는 얇은 주홍색 맨투맨 한 장만 입고 있어서였을까. 그날의 쌀쌀함은 잘 기억하고 있다.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고 집에 가려던 길이었다. 퇴근을 하는 직장인들과, 이른 술자리를 시작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도 이제 장롱에서 외투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10미터 앞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로또를 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잠시동안 행복한 기대감을 안겨주었다가 결국 오천원에서 오십원도 안 될 값어치로 바뀌고 버려지는 종이들. 당연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종이를 주어 당첨확인을 해보고 '에이 역시 그렇지' 하며 다시 같은 자리에 버리고 오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역시나 그날도 당연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아직 당첨발표를 하지 않은, 기대감이 남아있는 로또였다. '오천원 당첨되면 담배 한 갑, 오만원 되면 술 한잔' 그런 생각을 하며 빠르게도 기대감을 채우고 있었다.
다만, 약간 걸리던 것은 떨어진 종이 근처 멀지 않은 곳에 비틀거리며 가는 아저씨가 보였다는 것이다. 취한듯한 걸음걸이나 뒷주머니에서 반쯤 나와있는 지갑이, 떨어진 로또의 주인을 추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느리지만 묵묵히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고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그가 떨어진 종이의 주인이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로또는 내 손에 들어왔다.
카페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2주 연속 1등이 나온 소식으로 시작해 우리 동네 집값이 너무 올라 이제 이사 가려면 다른 동네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이야기꽃을 한참 피우다 문득, 지난번 주은 로또를 아직 확인 안 했던 것이 기억났다. 집에 돌아와 가방에 넣어둔 로또를 꺼냈다. 987회. 인터넷에 '로또 987회 당첨번호'를 검색하고 내가 들고 있던 것과 번호를 하나씩 맞춰봤다.
학창 시절 시험지를 채점할 때, 앞부분 문제들은 배점도 낮고 난이도도 쉬웠다. 동그라미를 기분 좋게 그리며 쭉쭉 나아갔다. 그러나 첫 끗발은 개끗발이라고 후반부로 갈수록 동그라미 대신 작대기가 점점 나오다가 마지막엔 작대기만 주욱 그어지며 결과는 엉망이 된다. 만약 동그라미만 끝까지 나왔다면 어땠을까? 머리는 좋은 편이지만 공부는 5학년 이후로 관심을 끊어서 동그라미로 가득한 시험지는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시험지는 동그라미로 채우진 못했었지만, 내 손에 들린 로또는 한 줄을 깔끔하게 채웠다. 딱히 엄청난 기분은 없었다. 1등을 해본 적이 언제였더라, 로또라는 게 되긴 되는 거구나, 신기하네. 딱 그 정도였다. 그래도 그날 저녁 출근길은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 해 가을은 아주 짧게 지나갔고 나름 따뜻했던 겨울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슬슬 봄이 시작되려 할 때였지만 여전히 로또는 방 안쪽, 가방에 들어있었다. 혹시나 들고 다니다 잃어버릴까 봐 그렇기도 했었지만 내심,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말이다. 당첨금은 23억이었다. 세금을 제하면 15억 정도. 만약 주은 것이 2등이었다면 확인한 다음날 바로 오천만원을 수령하러 갔을 것이다. 그러나 15억이란 금액은 단순한 결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4달이 지나도록 고민하게 했다. 당연히 15억이란 거금이 생긴다면 아주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고 여러 가지 편리함이 따라올 것이다. 걱정 없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직장은 취미생활로 바뀌고, 소비를 할 때엔 고민이란 과정 자체를 생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아직 가방 속 로또는 23억이 아닌 5천원짜리인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는 단순하게 내가 산 로또가 아니라는 점이 거슬려서였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름 모를 주인에게 미안하다던가 하는 마음은 1퍼센트도 없었다. 그냥 내가 산 게 아니라는 점, 그 하나가 너무나도 거슬렸던 것이다. 이런 고민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친지 모른다던데 내가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여름엔 끊임없이 유혹이 찾아왔다.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이 싫은데 그런 사람이 여름에 일까지 하면 얼마나 싫겠는가. 그냥 일을 때려치울까? 그래도 괜찮다는 확실한 보험이 나에겐 있었다. 23억을 품고 나니 월급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첨금을 받으러 가지 않은 건 기묘한 배덕감 때문이었을지도.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 얼굴을 보며 나는 23억을 떠올렸다. 다른 이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기분이 들었던 게 아니다. 그저 내 가방에 23억이 들어있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들조차. 그건 마치 판타지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물론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지만, 그렇게 환상 같은 시간은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요 앞에서 1등 나왔던 거, 아직 당첨금 안 받아갔다더라"
"어? 그거 1년 지나면 없어지잖아"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 누나와 친구가 꺼낸 대화였다. 어느새 9월 중순이 지나며 날은 선선해졌고 이미 사람들은 긴 팔과 외투를 꺼내 입고 있었다. 당첨금 수령 최종기한이 1달 정도 남자 뉴스도 나오기 시작했다. 복권방 앞엔 10월 31일까지 돈 받아가셔야 한다며 입간판도 세워뒀다. 그렇게 마지막 결정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1등 당첨후기글들을 찾아보며 어떻게 수령하는지도 알아봤고 적당한 가격의 아파트 매물도 검색해보곤 했었다. 가보고 싶던 나라 리스트도 몇 개 추려두고, 어떤 신차가 나왔나 보기도 했다. 주식이나 적금, 아니면 그냥 친구 말대로 건물을 사는 건 어떨까 고민도 했고, 놀긴 심심하니 작은 카페라도 하나 열어서 걱정 없이 장사하는 계획도 짜봤다. 여전히 로또는 가방 속에서 23억이 아닌 5천원 짜리인 상태였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오천 원도 과하게 느껴지는 쓰레기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수령과 포기 2가지 항목을 적어두고 돌림판을 끊임없이 돌렸다. 고민 중이었다.
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약간의 변화를 받아들여 그것이 다시 익숙해지는 것은 좋아하지만, 변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23억? 절대 약간이라 부를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결국 욕심을 떨치긴 어려웠다.
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점심 환한 시간. 드디어 가방에서 꺼내진 로또를 잘 챙기고 농협은행 본점으로 향했다. 502번 버스를 타고 차창 밖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봤다. 뒷자리에 앉아있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 주머니에 23억짜리 로또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종점인 남대문시장 앞에 내려 목적지인 농협은행 본점으로 걸어갔다. 몇 분 걷지 않았는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23억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받는다고 생각하자 또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줄곧 따라왔던 문제가 목전에서 다시 고개를 불쑥 들었다.
'내가 산 것도 아닌데 그냥 없던 일로 할까'
나는 미치지 않았지만, 남들에게 미친놈이라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건물입구를 앞에 두고 떠오른 고민과 나의 물욕. 두 가지의 상반된 것들이 줄다리기를 시작했고, 건물 주위를 5바퀴 돌고 나서야 승부를 낼 수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저녁 어둑한 시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가게에 들어갔다. '서울샐러드' 싱그러운 풀밭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지만 의외로 위스키를 파는 어두침침한 술집이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위스키 한잔과 하몽을 안주로 시켰다. 한잔 가격이 집에서 가끔 마시던 위스키 한 병 가격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주문할리가 없을 법한 것들. 향을 맡아보고 드시라며 추천해 주신 사장님의 말대로 고급스러운 향을 음미하며 기분 좋은 회상에 잠겼다.
같은 날 아침 해가 뜨기 전 어둑한 시간. 주말이라 평소보다 바빴지만 밤새 일을 즐겁게 하고 퇴근을 했다. 아직 어두웠지만 아침 공기는 상쾌했고, 딱 좋아하는 차가운 날씨였다. 날이 차가워지면 담배가 더 맛있어진다. 마치 한겨울 노천온천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들이마시는 연기에 찬바람이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오묘함이다. 집 앞 텃밭, 가지가 앙상한 목화나무를 바라보며 마지막 한 모금을 뱉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피우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로또를 꺼냈다.
며칠 전 마음속 줄다리기의 결과. 건물 주위를 뱅뱅 돌며 내린 결심. 나는 결국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었다.
최종수령까지 이틀을 남긴 아침, 난 23억짜리 불장난을 저질렀다. 살면서 해본 가장 미친 짓이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꽤 적절한 답변을 만든 것이다. 촛불보다 조금 크고, 가스불보단 약간 작은 규모의 불장난. 그것보다 재밌는 불꽃놀이를 생전에 다시 볼 일이 있을까? 1년간 덕분에 재밌었다는 인사와 함께 재가 된 그것을 날려 보내주었다.
"당첨금 결국 주인 안 나왔대"
"아, 그럴 거면 나한테 주지"
다시 카페에서 친구와 누나는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바지주머니에 넣고 빨았을 것이다, 술 먹고 잃어버린 거다, 애초에 조작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말했다.
"불장난하다 태워먹은 거 아닐까?"
은근슬쩍 꺼낸 나의 농담 같은 말에 친구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손을 태워서라도 로또를 구했어야지"
확고한 친구의 표정을 보며 그저 웃었다.
손이 살짝 뜨거워졌던 건 그냥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