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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n 27. 2023

사람이야기

주제 폭염

"으아!!!!"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온 용주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왜 그래?"

"편... 편의점 안에..."

얼마나 놀랐는지 말을 끝맺지 못하 용주의 표정을 지나쳐 녀석이 뛰쳐나온 편의점으로 시선을 돌렸다.

딸랑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걸어 나온 귀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긴 했다.

"어? 아저씨 왜 여기 있어요?"

 사복 습은 낯설었다. 그나마 자주 마주쳤던 나를 알아본 그는 가벼운 손인사를 건고, 곧바로 정신 사나운 걸음걸이와 함께 자리를 떴다.

"아저씨 출소했구나."

용주가 놀란 것이 이해는 다만, 뭐 그렇게 소리까지 지르고 그러나 싶었다.

"진짜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밖에저런 아저씨 만나 놀긴 하지. 자, 여기서 흩어지자. 재밌게 놀고 복귀 제대로 해라"

알겠다는 씩씩한 대답들을 남기고 각자 행선지로 향하는 후임들의 뒷모습을 하나씩 눈으로 챙겼다. 녀석들의 모습이 다 사라진 뒤에 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아저씨도 정신 차리고 살으라는 염려를 담은 부탁을 작게 얼거렸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맞나 싶지만 광주교도소는 그 말이 나름 어울다. 지금은 위치를 옮기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겠지만, 국내에 몇 없는 사형장도 있던 곳. 그리고 내가 2년간 신세를 진 곳이기도 하다. 론 합법적인 루트를 통해서이다.

난 20살에 군대에 갔다.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입대지원하기를 스스로 클릭하여 2주 만에 논산으로 향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거 그냥 후딱 다녀오자 하는 마음이었다. 친구들 중 가장 빨리 가서 군대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고, 얼마나 힘들 것인가에 대한 예상치를 꽤나 높여둬서였을까. 훈련소는 힘들다기보단 재밌다는 마음이 더 다. 살면서 언제 총을 쏴보고 수류탄을 던져보랴. 화생방조차, 괴로운 와중에 눈물콧물침이 무방비로 흐르는 스스로의 모습이 재밌어 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그렇 즐겁던 훈련소 기간이 끝나고 같이 차출된 동기 100명과 법무연수원으로 이동했다. '경비교도대'라는 존재는 그때 처음 알았다. 살면서 교도소를 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가게 되어 조금은 설레기도 했었다.


내가 근무한 곳은 '광주교도소'였다. 제비 뽑기로 걸렸는데 집에선 멀었지만 시골이 목포였던지라 할아버지는 자주 볼 수 있던 게 그나마 장점이었달까. 바로 근처 아파트와 홈플러스도 보이는, 꽤나 시내에 인접한 치였다. 도로에서 교도소 부지로 들어오면 외정문이 먼저 보인다. 그곳에서 방문목적을 밝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주차장과 높고 긴 담벼락이 이어진다. 그 담벼락을 따라 외곽으로 쭉 올라가면 내가 생활하던 교도대 건물이 나오는데 교도소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있었다. 담벼락은 정사각형의 네모난 모양으로 교도소를 가둬두고, 각 모서리엔 우리의 근무지이기도 한 감시대가 하나씩 있다. 교도대 건물 정반대 쪽엔 유일한 출입구인 정문이 있고 그곳을 거치지 않고선 교도소에 드나들 수 없다. 정문을 지나 교도소 안으로 들어서면 직원들이 근무하는 건물이 나오고 다시 그 안에서 통용문을 한번 더 거치면 사동들과 작업장, 운동장 등 수용자들의 생활공간이 나온다. 모든 공간 공간의 사이에는 통용문들이 있고, 자물쇠로 잠겨있다. 그곳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도 우리의 근무였다. 박수찬, 그를 처음 본 것도 통용문 근무를 설 때였다.

경비교도대 첫 근무지이자 가장 오랜 시간 고생한 근무지가 통용문이다. 두 시간씩 교대로 하루 3타임, 정자세로 가만히 서있다 지나가는 직원들이나 선임들 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그 단순해 보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 것이다. 막내 때는 선임들에게 혼날까 봐 시선조차 여기저기 돌리지 못하고 가만히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짬이 좀 차고 시간이 지나면 주변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는데, 나는 특히나 수용자들을 꽤 흥미롭게 봤었다.

얼핏 보면 도대 수용자들의 차이불법을 저질렀나 아닌가 가 전부이기도 다. 둘 다 강제로 끌려왔고, 교도소에서 생활한다. 규칙적인 시간표대로 일과를 소화하고, 들어올 때 정해진 기간을 채우기 전엔 나갈 수 없다. 모두는 아니지만 수용 특별휴가가 주어다. 내무생활을 보면 비슷한 부분들이 더 많다. 선진병영문화가 정착하기 었고, 국방부가 아닌 법무부 소속이라 부조리를 단속하기엔 살짝 동떨어져 있었다. 교도대의 부조리는 이전 군대에 남아있던 악습과, 교도소의 문화가 섞인 괴상망측한 합작이었다. 가장 선임에겐 매트리스를 두 장씩 겹쳐 깔아주거나 식사를 세팅해 주는 것, 막내들이 감당해야 하는 청소방식 같은 것들은 출처가 너무 확실한 교도소 내의 방식이었다. 처음엔 원래 군대란 이런가 보다 했었지만, 교도소 안 수용자들 생활을 보 비슷하다는 것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용자들이나 우리나 같은 사이구나라고 생각이 들고, 실제로도 수용자들은 평별 다를 것 없이 평범했다. 그래도 일반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본 수용자들의 대다수는 분노의 역치점이 낮다는 특징이 있었다. 일반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생활을 하다가도 갑자기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사고를 친다. 같은 방 동료와 즐겁게 장난을 치다가 혼자서 그것을 되뇌며 갑자기 화를 내고 주먹을 휘두른다. 순간의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가 아닌 국립요양원에 갇혀 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수찬이 아저씨는 특이한 인간이었다. 아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었다. 최소한 ADHD는 확실하다. 시종일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머리와 시선이 바쁘게 돌아다다. 걸음걸이부터 부산스럽고 머릿속에선 무언가 다른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듯 집중이라는 것이 안 느껴진다. 그는 강도사건으로 2년을 선고받아 들어왔지만, 사고를 계속 쳐 추가로 형을 받아 이미 2년을 훌쩍 넘게 그곳에서 나가지 못했다. 법정에서 검사 뒤통수를 때리거나 똥물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선임들부터 이어진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런 사람들은 확실히 사회에서 격리를 시켜주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교도소가 아니더라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시킨다던지 말이다. 하지만 언젠간 수찬이 아저씨도 출소를 하겠지. 어찌 되려나 싶었는데 그 시기가 그리 빨리 다가올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두 달에 한 번씩 외박을 나다. 5인 1조로 돌아가며 차례가 왔는데, 외박인원 중 가장 선임은 보통 점심을 사는 게 기본이었다. 그날은 내가 어쩌다 보니 가장 선임이었고 고기가 먹고 싶다던 후임들의 말에 고기뷔페에서 든든하게 한 끼를 챙겨 맥였다. 용주는 나보다 2 기수 후임이었는데 헤어지기 전 음료수나 한잔씩 마시자며 편의점갔고 그곳에서 뜬금없이 수찬이 아저씨를 마주친 것이었다. 용주 놀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을 시키고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집에 다녀오기엔 애매한 기간인지라 난 가까운 시골집에 들 푹 쉬었다. 군인정신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할머니의 고봉밥을 몇 번 해치우다 보니 순식간에 복귀날이었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어둡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아무리 밍기적거려도 택시는 교통체증 하나 없이 교도소 앞에 날 실어다 줬고 외정문에서 근무 중인 선임은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나의 형기를 버텨내야 했다. 귀와 동시에 교도소의 음기가 나를 반겼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라는 말을 몸소 체험하게 해 줬다.


수용자들의 옷은 크게 2종류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파란색 옷을, 아직 재판이 남은 미결수는 올리브색이다. 수찬이 아저씨는 줄곧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1년 가까이 봐왔고, 그러다 사복을 입은 모습을 봤다. 그의 사복을 봤던 외박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때에,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교도대 근무 중엔 수용자들의 재판을 함께 따라가 보조하는 출정 근무가 있다. 도소 밖으로 나가야 하기에 수용자들을 한 명씩 포승줄로 묶어야 하는데 수찬이 아저씨가 그 사이에 있었다.

"어? 아저씨 왜 여깄어요?"

여전히 정신산만 한 움직임과 머리는 약간 짧아져있었고, 올리브색 옷을 입고 있었. 밖에서 본 게 아직 한 달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건가 싶었다. 법정에서 들어본 내용으론 슈퍼에서 돈을 훔치고 점원때려 잡혀왔다고 했다. 아저씨의 국선변호사이미 그를 포기한듯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대화조차 제대로 불가능한 사람이었으니. 아마 그는 평생을 교도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겠구나 싶었다.


그 후로 그의 대한 소식은 따로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고참이 되어가며 근무지가 교도소 내부가 아닌 외부의 편한 근무들바뀌고, 수용자들과도 마주칠 일이 었다. 아마 그는 집행유예를 받진 못했을 것이고 다시 란색 옷으로 갈아입지 을까.

교도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살면서 평생 볼 일 없을만한 사람들이다. 그중 수찬이 아저씨가 유독 기억에 남아있던 것은 자체가 특이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다른그것만은 아니었다.

처음 교도대에 배치받아 정신없이 고생하던 8월. 찌는 더위에 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통용문에 서있었다. 그렇게 매 순간이 고통스럽던 시기에, 지나가던 수용자가 사탕을 건네줬다.

"고생해라"

수용자들이 건네는 것은 받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지만 그런 것조차 떠올릴 수 없는 막내 시절이었다.

"감사합니다"

당시에 난 그의 이름도 몰랐다. 특이한 걸음걸이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박수찬이다. 그 별거 아닌 사탕과 격려가 이제 막 군생활을 시작한 막내에겐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다. 한여름을 못 견딘 사탕은 녹아서 찐득거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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