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둔 종이박스가 흔들렸다. 바람인가? 평소처럼 신경 끄고 지나가려는데 걸음이 멈춰진다. 평소와 같이 흔한 흔들림이었는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바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혹시 박스 안에 쥐라도 들어있나 싶어 조심조심 다가갔다. 반쯤 닫힌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그 안에 있던 건 까만 쥐가 아닌 하얀색 털뭉치. 내 손보다도 작은 하얀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린 채로 미약한 심장박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동물을 흔하게 좋아해 왔다. 우리 집엔 내가 애기일 때부터 엄마가 키워온 열대어들이 있었고,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도 두어 번 데려왔었다. 우연히 발견한 날지 못하고 있던 새끼참새도 잠깐 키웠었고, 마치 유행 같던 햄스터나 거북이도 우리 집을 거쳤다. 개구리, 이구아나, 뱀 같은 파충류까지도 있었으니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동물들은 거의 다 키워본 듯하다. 물론 강아지는 항상 당연하게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고양이는 인연이 없었다. 개와 고양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이지선다 문제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렇게 되었다. 막연하게 고양이를 그렸던 적은 있었지만.
태어난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아이를 발견한 곳은 회사 바로 앞이었는데 박스는 내가 7시간 전에 버렸던 것이고, 나는 고양이를 그 안에 넣어둔 기억이 없었다. 아마 근처 뒷산에 사는 길고양이들 중 하나의 새끼일 것이었다. 회사 맞은편 식당사장님이 고양이들 밥을 챙겨주다 보니 근처에 항상 무리들이 어슬렁거린다. 가끔 처음 보는 새끼들이 몇 마리씩 나타나 뛰어다니는 것을 본 적이 종종 있었기에. 헌데 어째서 그 아이는 박스 안에서 어미도 없이 떨어져 있던 걸까. 그래도 태어난 지 좀 시간이 지난 듯, 털은 이미 뽀송해져 있었다. 전체적으론 하얗고 귀와 등 부분에 회색빛 털이 살짝 얼룩져 있었다. 발바닥엔 분홍젤리가 도톰하니 귀여웠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새근거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포근함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눈도 뜨지 못한 게 아니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없는 듯, 애초에 열릴 수가 없게끔 생겼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갓난쟁이가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게 아니라 박스 속에 떨어져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예전부터 요물이라 했다. 실제 지능이 어느 정도일진 모르겠지만 개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똑똑해 보인다. 한 번은 유독 춥던 겨울날, 회사창고 안으로 들어오려고 호시탐탐 눈치를 보던 고양이가 있었다. 약간의 관심을 줬더니 끝도 없이 따라와 앞문 뒷문 돌아가며 빈틈을 찾았다. 창고 안에는 식자재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안으로 들일 수가 없었는데, 한 시간 뒤 퇴근을 하려고 문단속을 할 때, 어느새 들어왔는지 창고 구석에 숨어있던 녀석을 발견했다. 출입문은 다 닫아놨는데 대체 어디로 들어왔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새끼의 상태를 깨닫고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엔 항상 근처에서 배회하거나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들이, 그날따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딘가에 숨어있나 싶어 자세히 살폈지만 내 시야에는 걸리지 않았다. 버려둔 박스 안에, 장애가 있는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가 우연히 있을 확률. 난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람들과 인접한 곳에 산다 해도 녀석들은 야생동물이었다. 야생에서 눈이 없는 새끼는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아이의 어미가 선택한 것은 새끼를 버리는 것이었지만, 아무 데나 방치하진 않았다. 새끼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손이 닿는 곳에다 버린 것이다.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었지만, 내가 인지하고 있는 고양이라는 동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겨졌다. 어느 교회에서 운영 중인 베이비박스가 문득 떠올랐다. 문자 그대로 베이비와 박스가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행일까, 새끼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람의 아기와 똑 닮은 울음소리를 들었다면 아마 달랐을 것이다. 과정이든 결과든 말이다.
정해진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난 그 아이를 한 시간쯤 바라보며 고민을 하다 그냥 두고 왔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엔 박스가 없었기에,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상태다. 생명의 소중함, 동물에 대한 애정, 동정심, 책임감. 그나마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이 정도지만, 조금은 더 복잡하고 깊은 것들이 머물렀었다. 선택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데려가는 것과 그냥 두는 것. 그 선택의 결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고려하진 않았다. 그저 그냥 두는 것을 골랐을 뿐이고, 고른 뒤에는 다른 의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결과는 항상 정해져 있다. 현재가 그 결과의 형태이고, 내가 고르지 않은 다른 선택에 대한 결과는 그저 허상이다. 가끔은 그 허상이 너무 짙어 그것에 짓눌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털어진다. 이 글은 이미 털려진 그것을 다시 주워 들여다보는 과정. 결과는 달라질 수 없지만, 다음번 과정은 바뀔 수 있고, 새로운 결과를 만날 수도 있다. 설사 결과가 같더라도, 끊임없이 과정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정해진다.
그때의 나의 선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정하지 않는다. 선악의 편 가르기도 없다. 그저 나는 선택했고, 그게 전부다.
그렇게 이루어진 결과인 지금의 나는, 나의 마음에 든다. 그럼 충분한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