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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Sep 12. 2023

예쁘게 부러지다

주제 병원

황량한 벌판 위엔 이제 소수의 병졸만이 남아 있었다. 서로가 알고 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사소한 선택으로도 승패가 갈릴 것이기에 극에 달한 긴장감만이 전장을 휘감았다. 사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상대는 움직였고, 나는 짜릿함을 느꼈다. 내가 예상한 승리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원하던 위치에 들어온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녀석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손이 떨어진 뒤였다. 나는 여유롭게, 승리를 만끽하는 움직임으로 말을 옮긴 뒤 조용히 외쳤다.

"장군"

상대측 응원단은 이미 패배를 통감하고 있었다. 내 뒤에 서있던 병근아저씨와 철호아저씨는 "외통수다!" 라며 승리의 나팔 대신 함성을 외치고 있었다. 좋은 승부.

"봉고가 이겼다!!!"

나의 휠체어를 밀며 달리던 아저씨들은 얼마나 신이 났는지, 간호사누나들의 경고를 무시하며 5층 복도가 떠내려갈 듯 소리를 질렀다. 마치 개선장군을 대하듯 나를 보며 기뻐해주던 우리 방 아저씨들의 얼굴은, 병원을 아직도 즐거운 공간으로 올리게 만들었다.


잔병치레 거의 없 몸으로 살아왔다. 흔한 감기조차 1년에 한 번이면 많이 걸리는 수준이 내가 유일하게 병원에 한 달 넘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은 불가항력에 의한 부상 때문이었다. 8살짜리 아이의 다리는 봉고차 밑에 깔리는 것을 무사히 버텨낼 수 없었다. '뼈가 예쁘게 부러졌다'던 의사 선생님의 말은 아직도 뉘앙스가 오묘하게 느껴진다만, 어쨋던 부러졌었다. 한겨울 빙판길과 90도로 꺾인 골목길의 조합은 나의 다리를 노란색 봉고차 밑으로 빨아들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골절의 경험 덕에 병원신세라는 것을 지게 되었다.

지금도 그지는 모르겠는데, 어린아이의 부러진 다리를 맞추는 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마치 장난감을 조립하듯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올바른 위치에 끼워 넣는다. 마취 따윈 없었다. 그 건장한 남자의사 두 명이 수술실에서 내 다리를 열심히 당겼다 놓은 것이 전부였다. 살면서 겪어 본 가장 극심한 고통. 수술이 끝난 뒤, 뼈가 제대로 안 맞춰졌으면 다시 부러뜨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깁스로 감싸둔 다리를 붙잡고 제발 제대로 맞춰지길 간절히 기도했었다.


병실엔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있었다. 허리를 다쳐서 들어온 병근아저씨와 창호아저씨, 손목과 손가락에 철심을 박고 있던 철호아저씨,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대머리독수리 할아버지, 그리고 8살의 나. 우리 방은 그렇게 5명이었다. 아저씨들은 내가 입원하게 된 경위를 듣고선 나를 '봉고'라고 불렀다. 참 아재스러운 네이밍센스. 아저씨들은 굉장히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중환자가 있는 병실이 아니라서 그랬던 건지, 그냥 나이롱환자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병실은 항상 즐거웠다. 심지어 8살짜리 아이 따 전혀 고려치 않고 음담패설 떠들어댔다. 시엔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기억도 못하는 내용들이지만 이상하게 뇌리에 박힌 하나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이야기의 의미를 실제로 이해하게 되던 순간, 아저씨들이 얼마나 저급한 농담들을 주고받았는지가 단숨에 와닿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저씨들의 인상이 안 좋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더 웃긴 아저씨들로 생각될 뿐이었다.


입원한 지 며칠 지났을 무렵, 아저씨들은 내게 장기를 둘 줄 아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하자 바로 실력테스트를 시작했다. 아저씨들은 나와 몇 판을 둬보고 바로 교육을 시작했다. 기본 규칙만 겨우 알던 수준이었는데, 그때 아저씨들에게 배운 장기실력은 훗날 군대에서도 먹힐 정도로 쓸만했다. 아저씨들의 교육은 사실 목적이 따로 있었다. 우리 병실이 있던 5층엔 나보다 먼저 입원한 동갑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옆옆호실에서 지내던 그 친구는 '갤로퍼'라고 불리고 있었다. 아마 우리 방 아저씨들만 그렇게 부른 거 같지만 말이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갤로퍼에 치인 그 친구는 뼈가 예쁘게 부러지지 않아서 수술을 여러 번 했다. 생뼈를 부러뜨리고 다시 붙이는 과정을 거치던 중이었다. 그런 갤로퍼와 새로 들어온 봉고, 양쪽 방 아저씨들은 우리 둘을 내세워 내기를 하려던 속셈이었다. 무료한 병원생활에 그만한 재미도 없었을 거다. 사실 장기뿐 아니라 휠체어 경주도 하려고 했었는데, 복도에서 달리다 간호사누나에게 심하게 혼난 뒤로 그 계획은 취소됐다. 아저씨들은 돌아가면서 나와 장기를 뒀고,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만화책, 컵라면, 마이마이. 내가 병원에서 처음 경험한 것들. 그 병원에 한 달 정도 신세를 졌는데, 그 기간 동안 본 만화책이 50권이 넘었다. 처음으로 먹게 된 라면이란 음식은 쌀밥을 넘어선 주식이 되었고, 음악이란 것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해줬다. 내가 병원을 떠올릴 때, 일단 좋은 기분으로 상상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아저씨들. 퇴원을 한 뒤에도 몇 번인가 만났었다. 족발집을 하던 창호아저씨 가게에 가서 다 같이 밥을 먹기도 했었고, 병근아저씨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1년에 한두 번씩은 놀러 오곤 했다.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정이 많이 느껴진 인연들이었다. 이미 한참이 지난 연임에도, 병원이라는 삭막한 공간을 즐거운 기억으로 만들어준 것 여전히 고마움을 느낀다.


"봉고야, 퇴원하면 엄마 말 잘 듣고 밥 잘 먹고 그래야 해"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남자가 울고 그래. 뚝!"

이미 눈물콧물로 범벅된 내 얼굴을 닦아주 아저씨들. 어린이였던 나는 아직 헤어짐의 과정이 익숙지 않았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 건너편에 살던 매일 보는 친구 이외에 처음으로 정을 나눈 이들과의 이별은 낯설었고 서러웠다. 아빠와 엄마는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우는 나를 달래며 병실을 나섰다. 갤로퍼에게 빨리 나으라는 편지를 전해주고 간호사누나들에게 감사인사를 돌렸다. 통깁스가 반깁스로 바뀌며 가벼워졌지만 발걸음은 더 무거웠고, 병원 앞 언덕 내리막길은 유달리 가파르게 느껴졌다. 쁘게 부러진 뼈는 예쁘게 붙어가고 있어서 다시 부러뜨릴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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