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자국이 없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이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문구가 아닐까. 일단 반을 접음으로써 시작된다. 반을 접었다 펴고, 다시 대각선으로 접었다 편다. 순식간에 새겨진 접혔던 흔적은 없던 일이라고 주장을 한들, 설득력을 잃었다. 한번 남겨진 자욱은 깊다.
한 장의 네모난 종이 안에서 가장 먼 꼭짓점 두 군데가 마주한다. 애초의 상태에선 절대 만나질 일이 없을 그 두 점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했다고 주장하듯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남았다. 위치의 변화는 모습의 변화로 이어지고, 모습은 계속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마지막에 어떠한 부분으로 남겨질지는 당시엔 파악하기 어렵다.
나의 발길은 나의 의도대로 향하였지만 그곳에서 불러들일 결과까진 예측하지 못한다. 원했던 결과이기도, 원치 않던 방향인지도, 혹은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부분들까지도 무작위로 찾아든다. 지나고서 되돌아본 곳엔 선명한 흔적만이 남겨져 있고 내가 원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움켜쥔 모양새로 주머니 모양을 만들고 좀 더 길쭉한 마름모를 접는다. 이전까지 행하던 방식이 그저 보이는 대로 쉽게 접어댔다면, 이젠 조금씩 복잡한 행위를 요구한다. 안으로 들여 접고, 위로 올려 접는다. 여전히 최종의 형과는 동떨어진 모양새지만, 그럴듯해지는 과정이다.
그저 마주침, 그저 인사, 그냥의 대화들은 거기까지다. 복잡해지는 마음을 조각해 나가기엔 부족하다. 미진한 나의 입은 그것을 소리 낼 수 없다. 필요한 다른 요소들은 점점 늘어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 것까지 담으려 애를 쓴다.
잘 접었던 것을 다시 잘 펼친다. 어느 순간 그것은 날개가 되어가고, 대가리와 꼬리로 변한다. 왜일까.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몇백 년이나 이어져 온 행위이다.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씩 찬찬히 뜯어봐도, 아직까지 나는 이 결과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떤 의미론 변상증의 극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처음에 준비해 둔 네모반듯한 종이는 이제 떠올릴 수가 없다. 이미 다른 형태로 완성이 되어버린 것. 애써 다시 처음으로 돌려본들, 자국은 더욱 복잡하게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펼치고 싶은 것은 의도치 않던 발걸음의 대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