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Oct 07. 2023

종이학/더하기

주제 소원

아무런 자국이 없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이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문구가 아닐까. 일단 반을 접음으로써 시작된다. 반을 접었다 펴고, 다시 대각선으로 접었다 편다. 순식간에 새겨진 접혔던 흔적은 없던 일이라고 주장을 한들, 설득력을 잃었다. 한번 남겨진 자욱은 깊다.


소원이라는 주제를 생각하여 종이학을 떠올렸다. 종이학을 접는 과정으로 가 느끼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나열하며 글 진행했다.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종이가 펼쳐진 상태로 시작한다. 상대의 존재조차 몰랐던 의 마음을 아직 손이 닿지 않은 빈 종이에 빗대어 표현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관용구는 단순히 언어유희적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첫 순간에 느낀 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종이의 형태를 만드는 과정 중엔 단순히 접기만 하는 것이 아닌, 여러 방향으로 접었다 폄을 반복하여 한 단계 복잡한 모양을 띄게 해야 한다. 아직 초반에 불과한 단계임에도 이미 종이는 흔적이 남고, 그것은 나의 마음이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나 교류의 횟수등이 크게 중요치 않다고 느낀 감상이다.


한 장의 네모난 종이 안에서 가장 먼 꼭짓점 두 군데가 마주한다. 애초의 상태에선 절대 만나질 일이 없을 그 두 점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했다고 주장하듯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남았다. 위치의 변화는 모습의 변화로 이어지고, 모습은 계속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마지막 어떠한 부분으로 남겨질지는 당시엔 파악하기 어렵다.


종이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의 내면과, 상대와의 관계. 한 장의 종이 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군데의 점이 만나게끔 접어둔 모양을 보고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가지기엔 어색한 감정들,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 여겼지만 너무나 비슷하다 느껴지는 상대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것들과 같다. 위치의 변화, 모습의 변화,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 종이와 내면. 이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는 일종의 공통점인 부분들이다. 하지만 종이접기 과정 중에 마지막 모습을 유추하기가 어렵듯이, 의 감정도 결국엔 어떻게 바뀔지 알기가 어려웠다.


나의 발길은 나의 의도대로 향하였지만 그곳에서 불러들일 결과까진 예측하지 못한다. 원했던 결과이기도, 원치 않던 방향인지도, 혹은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부분들까지도 무작위로 찾아든다. 지나고서 되돌아본 곳엔 선명한 흔적만이 남겨져 있고 내가 원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발길이란 문자 그대로 의 이동경로이기도 하고, 감정의 경로이기도 하다. 좋아서 찾아가고 좋아서 마음을 쏟지만 그것에 대한 결과는 중구난방으로 펼쳐진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쌓인 이후에 회고를 해보니 정확한 것은 흔적뿐이다.


움켜쥔 모양새로 주머니 모양을 만들고 좀 더 길쭉한 마름모를 접는다. 이전까지 행하던 방식이 그저 보이는 대로 쉽게 접어댔다면, 이젠 조금씩 복잡한 행위를 요구한다. 안으로 들여 접고, 위로 올려 접는다. 여전히 최종의 형과는 동떨어진 모양새지만, 그럴듯해지는 과정이다.


종이학 접기의 후반부는 조금은 어려운 과정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을 접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부분을 끌어내며 모양을 창조해야 한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하게 던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들어가서 생각을 해야 했고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끌어올려 파악해야 한다. 는 이 부분을 감정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모습과 비슷하게 여긴다.


그저 마주침, 그저 인사, 그냥의 대화들은 거기까지다. 복잡해지는 마음을 조각해 나가기엔 부족하다. 미진한 나의 입은 그것을 소리 낼 수 없다. 필요한 다른 요소들은 점점 늘어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 것까지 담으려 애를 쓴다.


종이학 접기의 과정이 복잡해지는 것. 그것은 타인과의 소통에서 단순한 행위로는 정도가 깊어질 수 없다는 생각과 궤를 같이한다. 소리 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의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낸다. 마지막 문장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상태이다.


잘 접었던 것을 다시 잘 펼친다. 어느 순간 그것은 날개가 되어가고, 대가리와 꼬리로 변한다. 왜일까.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몇백 년이나 이어져 온 행위이다.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씩 찬찬히 뜯어봐도, 아직까지 나는 이 결과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떤 의미론 변상증의 극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처음에 준비해 둔 네모반듯한 종이는 이제 떠올릴 수가 없다. 이미 다른 형태로 완성이 되어버린 것. 애써 다시 처음으로 돌려본들, 자국은 더욱 복잡하게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펼치고 싶은 것은 의도치 않던 발걸음의 대가가 아닐까.


종이학 접기는 일본에서 몇백 년 전에 시작되었다. 다 접고 나서야 그러려니 하지만, 접혀가는 과정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가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변상증처럼 뇌의 착각이나 착오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완성된 종이학을 보고 처음의 상태를 유추하기 어렵듯이, 는 상대를 접하기 전의 마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종이학처럼 이미 형태를 갖춰버린 마음은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런 의도 없이 지나가다 들린 만남이 결국 이런 형태로 남은 것이 내가 생각한 대가이다.

작가의 이전글 종이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