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기 힘들었지만 겨우 씻고 문을 열고 나왔다.
집 안이 고요한걸 보니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나 보다. 잉티만 내게 다가와서 털을 부빈다. 주인어머니가 키우는 페키니즈. 녀석을 쓰다듬으니 괜스레 집에 있는 딸기가 떠오른다. 가볍게 짐을 챙기고 숙소를 나선다. 해가 어슴푸레하게 떠오른 이른 시간이라 조금은 쌀쌀하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이 더 익숙해지게 만드는 날씨다. 차에 시동을 걸고 지도를 열어본다. 근방에 뭐가 있나 대강 둘러보다 끌리는 곳이 없어서 일단은 아소산으로 향한다. 분화구는 입장이 막혔다고 하지만 근처를 가보면 뭐라도 있지 않을까.
차는 막힘없이 굴러간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이런 과소지방 시골은 애초에 인구가 많지 않다.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아소산을 제외하면 펼쳐진 밭들과 농기계들, 휑한 주유소 따위가 전부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포스터엔 이 지역 정치인들의 얼굴이 건실하게 찍혀있다. 아소산 근처에 다다르니 공사차량들이 많이 보인다. 산 초입 근처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다. 돌아올 때는 다른 길로 우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공사현장을 조금 지나쳐 공터에 잠시 차를 세운다. 자판기에서 산 캔커피 한잔을 마시며 담배를 태운다. 일본의 장점 중 하나는 자판기가 정말 어느 곳에든 있다는 것이다. 어디를 다니던 목이 마를 걱정은 없다. 라디오에서 교통정보를 알려주지만 내겐 필요가 없으니 주파수를 돌린다. 아침에 어울리는 상큼한 노래가 나오는 채널을 맞추고 담배를 마저 태운다.
구불구불하게 꼬인 도로를 천천히 올라갈수록 날이 흐려진다. 산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한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걸 보니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괜히 걱정된다. 다행히 비가 쏟아지진 않는다. 하염없이 산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꽤 높이 올라와있었다. 계속 나무들만 빼곡한 주변풍경이었는데 산 위쪽은 초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소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고 말들이 햇빛을 받으며 달리고 있다. 대자연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그림이다. 아소산 전망대에 도착하니 다시 날씨가 안 좋아졌다. 안개가 잔뜩 끼고 바람이 거세졌다. 어차피 출입이 막혀있어 가까이 갈 순 없었지만, 날씨가 조금 풀렸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아빠와 같이 온 아이는 그저 풍선을 들고 신나게 뛰어다닌다. 지도를 열고 올라온 길과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훑어본다. 가는 길에 들를만한 데는 없나 살펴보며 다시 바퀴를 굴린다.
다시 해가 밝아졌다. 산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이 내리는 햇살은 웅장한 느낌이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차를 잠시 세우고 지도에서 킷사텐을 검색한다. 일본에 오면 항상 들리는 곳.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고 맛이 좋은 커피가 있다. 출출할 땐 끼니도 때울 수 있고, 흡연도 가능하다. 여러 곳의 킷사텐을 다녀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곳은 없었다. 가게 앞에 조그마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니 인상 좋은 할머니가 맞아준다. 차가운 블랙커피 한잔을 시키고 내부를 둘러본다. 할머니는 황동으로 만든 재떨이를 내어주시곤 느긋하게 커피를 내린다. 순식간에 커피 향이 실내에 가득 차고, 전축에선 클래식 음악이 울린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나뿐이다. 나른한 여유로움을 즐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숙소 근처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밤바람을 맞는다. 눈 오는 겨울 노천탕이 아직까진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가을도 가을 나름의 맛이 있다. 기분 좋게 피로를 풀어가며 짧은 일정을 마무리 짓는다.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구나. 그 덕에 다시 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