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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Mar 24. 2023

그저 다 좋은 여행

주제 취향

1월 9일 날씨 시기에 맞지 않는 따스함

규슈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소도시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공항이 소소하고 아담한 것이 90년대 동네 전철역 같은 향수를 품고 있었다. 인천이나 나리타처럼 현대적 공항들보다 느낌훨씬 좋다. 공항 앞 버스 승강장 옆엔 족욕장도 있었탕에 발을 그고 맞는 찬바람은 완전한 만족감을 주었다. 노천온천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순간이기도 다.

늦은 오후에 입국한지라 일단은 바로 숙소로 향했다. 대충 짐을 풀어두고 가볍게 시내나 둘러볼 겸 방을 나섰다. 중앙역에 있는 관람차도 타보고 심야영화도 한 편 봤다. 번화가를 산책하다가 맘에 드는 술집에 들어가 우설에 생맥주도 한 잔 마셨다. 우설 두께는 얇은 것보단 두껍게 썰어진 게 맛있고, 양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소금만 친 것이 가장 입에 맞았다.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두고 주변 소리에 집중해 보니 그제서야 일본에 있구나라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사실 술집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말이 아닌 일본어로 떠드는 소리는 소음이라고 느끼지 않나 보다. 그 조차도 여행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건지. 잘 구워진 한 점과 부드러운 생맥주, 그리고 외국인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저녁 식사를 즐겼다.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야끼소바 컵라면과 메이지우유 500미리 한팩을 샀다. 일본여행을 가면 매일 저녁 반드시 사는 필수품이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하루의 마지막엔 무조건 먹는다. 물론 맛 때문도 있지만, 어느 순간 맛보단 일종의 루틴처럼 그렇게 정해졌다. 야끼소바는 일본요리의 모든 것이 담긴 음식이다. 면, 간장, 설탕, 가쓰오부시, 마요네즈. 마치 우리나라 요리에서 김치 고춧가루 마늘 같은 포지션을 담당하는 재료들 같다. 그런 야끼소바에 고소한 우유까지 마셔주면 하루가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산뜻한 첫날이었다.




1월 10일 날씨 바람이 강함

아침 일찍부터 조금 더 남쪽인 이부스키 라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해안도로를 끼고 터덜거리며 달리는 버스는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기차처럼 레일 위에서만 달리는 것이 줄 수 없는 불안정함이 좋다. 끊임없이 바뀌는 바깥 풍경은 그저 이동할 뿐인 시간마저 여행의 한 파트로 바뀌게 해 준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이부스키의 첫인상은 '인기 없는 지방 관광도시' 였다. 역 앞 상가들은 대다수가 닫혀있었고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함만 느껴졌다. 그게 너무 좋았다. 근처 식당을 찾아가 한 끼를 때우고 목적인 모래찜질을 하러 갔다. 이부스키는 원래부터 온천이 유명한 도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료칸들도 있는 동네인데, 그런 평범한 온천뿐만 아니라 모래찜질도 명물이다. 어렸을 때 바다에 가면 한 번씩 해보는 모래에 묻히는 행위, 그것과 다른 점은 온천지대라 모래가 따뜻하다는 것. 바다를 바라보며 따스한 모래에 묻힌 채 얼굴로만 해풍을 맞고 있는 기분. 땅에 묻히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라는 이상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운하게 모래찜질을 마치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일본 시골과 한국 시골의 다른 점은 단정함의 차이인 거 같다. 어찌 됐든 시골은 시골인지라 약간의 촌스러움은 있지만, 도로정비나 가로수들이 관리가 잘 되어있고 깔끔하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시골감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한참을 정취에 젖어가며 걷다가 우연히 어느 가게를 마주쳤다. 가정집을 실내만 인테리어 해서 장사를 하고 있는 카페였는데 소담한 분위기에 끌려 저항 없이 들어갔다. 아아 한잔하고 난생처음 보는 몽블랑이란 디저트를 시켰다. 밤앙금 같은 것이 얇은 국수처럼 뽑혀 나와 만화에서 그려놓은 똥모양처럼 돌돌 말려있는 모습이 흥미롭게 생겼다. 평소에 단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썩 맛이 좋았다. 새로운 취향이라는 건 이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기도 하나보다.

돌아오는 길엔 일부러 버스가 아닌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우연히 같은 칸에 하굣길 학생들이 함께 탔는데 아이들의 생기까지 보너스로 느낄 수 있었다. 개운한 둘째 날은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물론 숙소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또 들렀다.




1월 11일 날씨 첫날과 비슷해짐

가고시마 바로 오른쪽에 배로 10분 정도 타고 가면 나오는 섬이 있다. 사쿠라지마 라는 곳인데 아직까지 잘 끓고 있는 활화산섬이다. 요즘도 종종 연기를 신나게 뿜고 있는 모습이 스에 나온다. 벚꽃섬 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언밸런스함이 재밌다. 섬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구경을 했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어느 조각상 앞이었다. 한 남자가 입을 쩍 벌린 채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안내판을 읽어보니 나가부치 쯔요시 였다. 예전엔 국내에서도 유명했던 왕년의 잘 나가던 가수다. 일본의  옛노래들을 좋아하는 나도 그의 노래를 종종 들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사쿠라지마 출신이었고, 후에 금의환향하여 그곳에서 성대하게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조각상을 남겨둔 것이라고 안내판은 알려줬다. 당시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멋진 분위기를 담은 사진이 찍혀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자연스레 이어폰을 끼고 그의 노래를 틀었다. 화산 아래에서, 나가부치 쯔요시 조각상 앞에서, 바다 건너 가고시마를 바라보며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 전혀 생뚱맞은 조건들이 하나씩 모여만들어낸 순간이었다. 그가 도쿄에 상경해서 느꼈던 젊은 날의 감정들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전혀 다른 상황임에도 같은 감정선이 느껴졌던 것은 기분 좋은 소름을 돋게 해 줬다. 

돌아오는 길에 선착장 근처에 있는 수족관에 들려 돌고래쇼도 고 이색적인 물고기들도 구경했다. 그리고 저녁으로 스시를 먹으며 아까 그 물고기들은 횟감용으로 적절한가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그중 몇몇은 맛이 궁금하기도 했다. 실없는 상상을 하며 마지막 밤을 위한 한잔을 마셨다.




1월 12일 날씨 그저 맑음

누군가 나에게 가고시마에서 어딜 가면 좋냐고 묻는다면 꼭 추천하는 몇 군데가 있다. 그중에 만약 차를 렌트해서 간다면 반드시 들리라고 말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가모우노오오쿠스. 가모우에 큰 나무 라는 뜻으로, 순위정하기 좋아하는 일본에서 거목순위 1등을 차지한 나무다. 추정나이 1500살인 역사적인 나무는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어느 신사 안에 있다. 마지막 날에 나는 그 곳에 들렀다. 새빨간 도리이라는 문을 지나 신사로 들어가면 저 멀리서부터 사이즈감이 이상한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 발씩 다가설수록 말도 안 나오는 위용을 뽐내며 압도한다. 후에도 10위 안에 든 다른 나무들을 찾아가 봤지만, 그때만큼의 인상은 받을 수 없었다. 키가 더 높은 나무도 있었고, 훨씬 넓고 무성하게 가지가 펼쳐진 나무도 있었지만 어딘가 조금씩 부족했다. 크기도 크기지만 그것이 사는 신사의 분위기도 한몫했던 거 같다. 신사 전체가 마치 나무의 한 줄기인 것 마냥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 느낌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을 떠올려봤지만 나의 부족한 언어로는 여전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며 여행의 마지막을 즐겼다.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 하늘 위에서 며칠간의 여행을 되새겨봤다. 하루하루가 완전하게 마음에 든 날들이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그 몇 일간은 모든 것들이 좋았던 시간이었다. 아마 내가 이후로도 일본여행을 계속 갔던 건, 그런 날들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두고 싶은 마음이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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