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브(The Tribe, 2014)
트라이브(The Tribe, 2014)
이 영화는 수화로만 진행됩니다. 어떠한 번역과 자막, 해설도 없습니다.
라는 안내와 함께 영화는 시작됩니다. 기숙학교로 전학을 온 세르게이(그레고리브 페센코). 기숙학교의 모든 학생과 교직원은 소리를 듣지 못하며 수화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또한 소위 잘나가는 애들로 구성된 조직(The Tribe)이 지배하는 학교입니다. 세르게이는 조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그들과 어울리게 되고 점차 그들처럼 변해갑니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시놉시스입니다. 그 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해석이 필요한데, 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언어적 표현'이 없음에 기인합니다.
의사소통에 있어 우리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을 구사하게 됩니다. ‘언어적 표현’은 음성 또는 문자를 통한 표현을, ‘비언어적 표현’은 몸짓, 손짓, 표정 등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통한 표현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이 적절히 어울려야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해집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언어적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들의 비언어적 표현(수화와 표정, 옷차림, 이어지는 상황 등)만 가지고 장면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영화에 대한 몰입도와 더불어 피로감을 주는 양날의 검이 됩니다.
비언어적 표현에 대한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만큼 해석의 내용도 관객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일부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는 공식 시놉시스에 주관적 해석을 첨가했는데, 이는 영화에 대한 해석의 범위를 좁힌 것 같아 아쉽습니다.).
첫 번째로는 ‘세르게이가 안나(야나 노비코바, 긴 머리 여학생)를 사랑하는가?’입니다.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렇습니다.
1. 세르게이는 안나가 트럭에서 성관계하는 모습을 본다.
2. 세르게이는 안나에게 돈을 주고 둘은 성관계를 갖는다.
3. 세르게이는 안나가 매춘을 하지 못하게 한다.
4. 기차에서 세르게이는 돈을 훔치고 그 돈을 안나와 성관계 후 준다.
5. 세르게이는 운전기사(목공예 교사)를 죽이고 돈을 훔치고 그 돈을 안나에게 주고 성관계를 갖는다.
6. 세르게이는 우연히 발견한 안나의 여권을 빼앗아 찢어버린다.
좋게 얘기하면 세르게이는 안나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안나의 육체를 소유하고 싶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안나의 성관계 모습을 보고 그녀를 탐하게 되고, 그녀를 얻기위해 돈을 구하고, 그녀를 독점하기 위해 매춘을 하지 못하게 하고, 운전기사를 죽이고,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권을 찢어버리고.
사랑이라 할 수 있지만 조금은 비뚤어진 사랑으로 보입니다.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성관계를 가질때마다 돈을 줬을까요? 서툰 사랑의 표현이라 하기엔 세르게이는 안나를 그저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안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는가?’입니다. 영화 중반부, 운전기사와 중개인, 그리고 조직의 리더가 등장합니다. 이들의 대화 뒤에 안나와 친구가 등장하고 이탈리아 기념품을 입고 설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후 중간 중간 여권을 발급하기 위한 절차들을 보여주고, 운전기사와 조직의 리더가 어떤 대화를 나누며 화면을 빠졌다가 다시 들어옵니다. 이들이 나눈 대화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안나와 친구가 더 나은 삶을 살게끔 이탈리아로 보내는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안나와 그녀의 친구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조직이 운영되는데, 그 돈줄을 해외로 고이 보내준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오히려 해외로 보내 활용하겠죠.
영화의 모든 장면은 롱테이크로 이뤄집니다. 해석을 해야만 하는 관객들을 위해 시간적 여유를 주는 감독의 배려로 느껴집니다. 재밌는 건 모든 롱테이크 장면에서 클로즈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해석하기 쉬운 주인공들의 표정을 단 한 번도 클로즈업 해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카메라는 계속 일정 거리를 두고 주인공들을 관찰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영리한 표현입니다. 관객의 해석을 위해 감독은 영화에 비춰지는 조직에 대해 객관적 사실만 보여줄 뿐이니까요.
우리 뇌에는 ‘거울신경(Mirror Neuron)’이란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직접 행동한 것처럼 신경세포에서 똑같은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거울 신경이 담당합니다. 쉽게 말해 ‘공감’을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종이에 손가락이 베여 아파하는 소리와 몸짓을 통해 마치 내가 손에 베인 것 마냥 느끼게 되는 현상이 그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공감이 온전한 형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소리가 없으니까요. 누군가에게 맞을 때 둔탁한 소리만 날 뿐, 비명소리 내지 신음소리 나지 않습니다. 차에 깔리는 장면에서도 비명소리, 멈추라는 소리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안나가 중절수술을 받을 때는 신음소리가 나지만 그 조차 온전한 소리도 아닙니다. 또한 그 고통을 겪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 소리 내지 장면이 고통에 대한 공감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장치임에도 이들이 빠져있어 공감의 정도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맞고 있네.', '차에 깔렸네.' 식의 무덤덤한 공감만 돌아옵니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단순하지만 외적인 부분에서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끊임없이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몰입도가 뛰어나면서도 피곤한 영화지만 여운이 강렬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고요한 기숙사에서 울려퍼지는 세르게이의 마지막 분노는 굉장합니다. 고통에 대한 공감의 정도가 덜 할지라도 안나를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그 분노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에 그 울림은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
1. 끊임없는 해석을 통한 몰입도
2. 주관적 해석을 가능케 한 감독의 객관적 표현력
1. 롱테이크의 지루함
2. 단순한 시나리오
3. 끊임없는 해석으로 인한 피로감
1.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청각장애인이다.
2. 이 영화는 34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있다.
3. 감독은 수화통역사를 통해 배우들과 소통하며 촬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