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봇 드림>-
함께 작렬하다가도 이제는 저마다의 자리를 부유하는 우리를 생각한다. 나란하지 않게, 조금은 서먹하게. 이건 그저 수취인 없이 떠도는 문장. 헤어진 과거와 헤어질 미래의 형상을 더듬으며, 어렴풋이 남겨보는 말.
열렬했던 시절은 어째서 멸종되고야 마는지. ‘뜨거운 물도 언젠가 식는다’라는 상식 따위가 투영되기엔 우리의 세계는 유난하고 각별하지 않나.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은 종착하고, 그곳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음에도 어느새 받아들여 버려서 때로는 두렵기도 했던 날들을. 나는 안녕이라 하기 전에 목이 메는 사람, 그걸 핑계 삼아 인사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 못다 한 인사를 하기 위해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 맞잡은 끈의 끝이 보일 때쯤이면 더 길게, 길게. 순간을 수선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이토록 고질적인 미련함이 건네지 못한 안녕을 발화하는 작품에 이끌린다. 스크린 앞에서만큼은 끝을 인정할 수 있으니까. 내게는 그런 영화가 있다. 스쳐 가는 것들을 받아들일 결심을, 의연해질 용기를 주는 작품. 바로 지금, 어떠한 말 없이도 사랑하고 작별하는 영화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본 글은 영화 ‘로봇 드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봇 드림’은 2024년 3월에 개봉한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51회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소리는 있지만 대사는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무성영화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절히 삽입된 음악과 비명이나 숨소리 등의 복합적인 사운드 덕에 대사의 공백을 느낄 틈이 없다. 오히려 어떠한 말 없이도 느껴지는 그들의 사랑에 더욱 매료되기도 한다.
작중 등장인물은 모두 동물 혹은 로봇의 형상을 띈다. 영화의 주인공 역시 개와 로봇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며, 말도 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 관계가 우정인지 연인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불투명하기에 마침내 비추어지는 것이 있다. 우리는 언어, 종,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이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관계란 어느 때나 형태를 초월해 존재해 왔으니 이 이야기에서 형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뉴욕에서 홀로 생활하며 외로움을 느끼는 개.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던 그는 우연히 TV 광고를 보고 로봇을 구매한다. 개는 손수 조립한 로봇과 늘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어느 날 공원에서 둘은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탄다. 카세트테이프에서는 Earth, Wind&Fire의 ‘september’가 흘러나오고, 화면은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는 둘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핫도그를 먹고, 게임을 하고, 네 컷 사진을 찍는, 개와 로봇의 사소한 순간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함께 듣던 음악에 스며든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세계를 직조한 것만 같다. 다른 이는 모르는 곳, 오직 우리만이 기억하는 세계를. 언젠가 그 노래를 재생할 때면 그렇게 지나온 날들이 떠오르겠지. 스크린 너머에서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개와 로봇은 해변에서 또 다른 추억을 쌓는다. 바다를 처음 본 로봇은 신이 나 몸을 물에 담그고, 함께 물살을 가르며 한창 시간을 보내다가 잠시 모래사장에 누워 쉰다. 해가 다 저물고 개는 로봇을 깨워본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다. 갑자기 일어서지 못하는 로봇. 개는 안간힘을 써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모두 떠난 해변에서 도와줄 이는 없고, 결국 개는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다. 로봇은 어서 가보라고 눈짓하는데, 이런 그의 눈빛은 마치 기다리겠다는 말로 들려온다. 서로를 마주한 채 주고받던 눈빛에는 걱정과 사랑 그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다음날 개는 부랴부랴 로봇에게 향하지만, 해변은 문을 닫았고 그 앞에는 6월 1일에 개장한다는 안내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기다리겠다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다. 과연 이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작중에는 로봇의 꿈이 수차례 등장한다. 바다를 표류하던 토끼 무리의 도움을 받아 개를 찾아가는 꿈, 소복이 쌓인 눈을 헤집고 개에게로 향하는 꿈.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로봇과 걷는 모습을 보는 꿈. 영화의 제목인 ‘로봇 드림’처럼 로봇은 자꾸만 꿈을 꾼다. 그 과정은 다를지라도 결말은 언제나 개에게로 도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예전처럼 함께이고 싶은 마음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꿈’은 수면 중 이루어지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간절한 희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이 헤어지기 전 같이 보던 TV에는 ‘오즈의 마법사’가 나오는데, 이는 추후 로봇의 꿈에 오마주* 된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고 모래사장 한가운데에서 꽁꽁 얼어붙은 로봇. 꿈에서 그는 얼음을 깨고 영화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직접 화면을 전환한다. 뒤집힌 화면에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풍경이 담겨 있다. 생동하는 계절 속 저 멀리 있는 에메랄드빛 성, 그 위에 떠오른 무지개. 노란 벽돌 길을 따라가니 그곳엔 개의 집이 있었다. 원작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란 벽돌 길을 따라 마법사 오즈를 찾아간다. 이는 어딘가 로봇의 처지와도 비슷해 보인다. 돌아가기 위해 헤매더라도 도착해야 하는 곳, 로봇에게는 그 장소가 개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조차도 언젠가 개와 함께 보았던 대상이 반영되었다. 그런 경험이 있을까. 누군가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유난히 선명히 남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게 꿈에서까지 나타나는 경험. 관객에게는 찰나와도 같던 장면이지만 로봇은 그런 오즈의 마법사를 꿈꾼다. 보고 싶다는 말 없이도 전달되는 감정. 로봇 드림에서 꿈이란 그의 마음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매개이자, 이곳의 언어이다.
*오마주(hommage): 타 작품의 장면이나 스타일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의도적으로 인용하는 것이다. <로봇 드림>은 포스터와 스틸컷 등에서도 오즈의 마법사를 오마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몇 번의 계절을 지나쳐 드디어 6월 1일을 맞은 개는 바로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그의 후각은 아직도 로봇을 기억하고, 그리운 향이 나는 곳을 하염없이 파보지만 어디에도 로봇은 없다. 사실 로봇은 철물점에 팔려 간 것인데, 개는 그를 알 길이 없다. 서로를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그렇게 이별하게 된 이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헤어지고 말았다.
무척 그립다. 하지만 둘은 그러한 그리움에 매몰되지 않고 그저 나아간다. 개는 로봇 용품점에서 또 다른 로봇인 ‘틴’을 만나고, 로봇은 철물점에 방문한 너구리에 의해 새롭게 조립된다. 이때부터 William Bell의 ‘happy’가 흘러나오며, 함께 야구를 관람하고 피자를 먹는 너구리와 로봇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해당 장면은 앞선 개와 로봇의 롤러스케이트와 병치 된다. 이처럼 영화는 유사한 연출 속에서 음악을 달리하여 관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끝날까? 어느 날 로봇은 창문 밖에서 틴과 함께 걷는 개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지 않으며, 자신이 여기 있노라 외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september를 재생할 뿐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저 멀리 있는 개도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늘 나란히 듣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개와 로봇. 더는 같이 있지 않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옆을 응시하며 손을 가져다 대어 본다. 분할된 화면은 그들이 이제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뚜렷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같은 동작을 하며 서로의 손이 맞닿는 연출은 저마다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같은 춤을 춘다는 걸, 둘은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 괜스레 마음이 뻐근해진다. 떨어져 있음에도 한 장면에 담기는 둘, 그리곤 끝내 만나지 않고 서로를 보내주는 결말. 그 앞에서 확신하고야 만다. 나는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됐구나.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잃더라도,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들은 우리 안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영화는 ‘September’ , ‘happy’와 같은 팝송을 활용해 둘의 로봇과 개, 로봇과 너구리의 관계를 모두 담아낸다. 저들은 각자 다른 음악을 들으며 추억을 쌓아가고, 그런 노래를 재생하여 회상한다. 우리가 음악이나 공연, 향 등을 통해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때때로 무형물에 스며드는 휘발성의 특징을 감독은 음악으로 재현한다. 우리가 결국 멀어지더라도 서로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메시지들을 전한다.
‘그럼에도 살아가자’는 말을 좋아한다. 어떠한 문장이 앞에 오더라도 고개 숙이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헤어짐을 두려워한다. 헤어짐이 주는 복잡한 엉킴과 감정들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날들이 싫다. 이 영화는 그런 나에게 말한다. 그럼에도 살아가자고.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세계가 해체되어도 너와 내가 그 자리에 존재했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순간은 머무를 테니, 그래서 보내주기로 하였다. 이제는 너무 반가운 September의 첫 소절을 읊조리며. “Do You Remember?”
editor. 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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