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을 찾아 떠난 독일, 그 첫 번째 여정
올해는 낭만주의의 위대한 영혼, 로베르트 슈만이 세상을 떠난 지 1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세기 하고도 반이 넘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음악이 품은 사랑의 온도는 여전히 식을 줄 모릅니다. 이 뜻깊은 해를 맞아, 그를 찾아 떠났던 저의 뜨거웠던 여정을 시작해 봅니다.
사랑을 더는 사랑하지 않을 때,
슈만의 음악은 식상해졌다.
우연히 읽게 된 어느 평론가의 이 문장은 저를 큰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저에게 가장 빛나는 별과 같은 슈만의 음악이 언젠가는 그 빛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은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바로 지금, 그에게로 떠나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2025년 4월, 저는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 여행의 목적은 오직 하나, '로베르트 슈만'이었습니다. 때로는 심장의 가장 여린 곳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격정적인 낭만의 파도 속으로 이끄는 그의 선율을 따라 걸으며 그의 뜨거웠던 사랑 이야기에 조용한 축배를 들고, 깊은 고뇌의 흔적 앞에서 위로를 건네 보았습니다. 그 길 위에서 저는 제 안에 깊이 자리한 슈만을 향한 사랑을 더욱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사랑을 갈망하고, 슈만의 음악에 온전히 나를 던질 수 있는 이 귀한 마음의 계절을 떠올리며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결코 빛바래지 않을 영원한 기억으로 붙잡아 두겠다고 다짐하며 써 내려간 제 기록, 그 설레는 첫 페이지는 슈만만을 테마로 한 뮌헨 필하모닉의 3월 정기공연으로 시작됩니다.
뮌헨에 도착하자마자 '가슈타이크 HP8(Gasteig HP8)'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1893년 창단되어 수많은 거장의 손길을 거쳐 세계 최고 반열에 오른 뮌헨 필하모닉의 임시 거처다. 본래의 콘서트홀인 '가슈타이크'가 리모델링 중이라 이들이 잠시 머물고 있는 이곳의 첫인상은 굉장히 소박했다. 마치 대형 할인매장을 연상케 하는 모던하고 투박한 외관은 고색창연한 빈의 무지크페라인과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현대적인 면모뒤에는 거장의 숨결이 서려 있었다.
로비에서 이 악단을 세계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세르주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의 흉상을 마주했다. 녹음을 철저히 거부하며 "나의 음악을 들으려면 뮌헨으로 오라"라고 호령했던 전설적인 지휘자 '첼리비다케'. 차가운 흉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뮌헨 필을 지키고 있는 그의 깐깐한 눈매가 내게 묻는 듯했다.
"오늘 우리 악단이 들려줄 슈만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첼리비다케 흉상을 뒤로하고 펼쳐 든 프로그램북에서, 오늘 공연의 진짜 주인공을 만났다. 1841년, 클라라와 결혼한 첫해에 '교향곡 1번'을 쓰던 시기의 초상화였다.
그가 생애 가장 행복했을 때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묘한 두근거림이 일었다. 마치 오랫동안 동경해 온 아이돌을 마주한 소년처럼 심장이 요동쳤다.
이날의 지휘봉은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Mirga Gražinytė-Tyla)가 잡았고, 바이올리니스트 빌데 프랑(Vilde Frang)이 협연자로 나섰다. 프로그램은 슈만의 생애를 아우르는 구성이었다. 1부에서는 그의 마지막 대규모 작품인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2부에서는 푸릇푸릇함이 생동하는 그의 첫 교향곡인 '교향곡 1번 봄'을 연주했다. 이것은 비극적인 어둠의 끝자락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되돌아가는 시간 여행이었다.
1부, 빌데 프랑의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지자 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연주는 슈만의 고통을 대변하듯 처연했다. 뮌헨 필하모닉이 특유의 빈틈없고 견고한 앙상블로 바닥을 묵묵히 지탱해 주는 사이, 프랑은 과감한 루바토와 섬세한 보잉으로 마치 고통 속에서 해방된 영혼처럼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날개 꺾인 나비처럼, 혹은 뒤셀도르프 라인강의 차가운 물결에 몸을 던진 슈만의 처연한 독백처럼 유유하고 외롭게 노래했다. 슈만이 천사에게 들었다던 그 환영의 선율이 흐를 때, 거리의 악사가 되어 홀로 핀 조명을 받으며 연주하는듯한 그녀의 모습은 엔데니히 병동의 창가에 기대어 닿을 수 없는 곳을 응시하던 말년의 슈만과 겹쳐 보였다.
인터미션 후 이어진 교향곡 1번 '봄'은 그 짙은 슬픔을 단번에 씻어내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봄을 알리는 도입부의 호른과 트럼펫 팡파르는 뮌헨 필의 중후한 품격을 보여주었고, 3악장 트리오에서는 베토벤을 연상케 하는 힘 있는 리듬감이 살아났다. 지휘자 틸라는 마치 춤을 추듯 악단과 한 몸이 되어 왈츠를 지휘했다. 무엇보다 2악장 후주에서 트롬본이 빚어내는 묵직한 감정선과 피날레의 정점을 찍는 플루트의 음색은 그 어떤 음반에서도 느끼지 못한 오직 이 공간, 이 순간에만 허락된 벅찬 환희였다. 클라라와의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은 청년 슈만의 터질듯한 행복이 콘서트홀의 높은 천장을 가득 채웠다.
모든 연주가 끝나고 이어진 커튼콜에서 지휘자 틸라는 관객에게 받은 축하 꽃다발을 망설임 없이 악장에게 건네며 공을 돌렸다. 그 겸손하고 따뜻한 모습에서 나는 문득 슈만이 클라라에게 바친 가곡 ‘헌정’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너는 나보다 더 나은 내 자신(Du bist mein besseres Ich).'
비극적인 말년의 어둠과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봄빛이 따뜻하게 포옹하며 막을 내린 이날의 공연은 내게 깊은 위로를 건넸다. 위대한 음악가는 고독 속에 쓸쓸하게 눈을 감았지만, 그의 사랑은 영원한 봄으로 남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설레는 마음을 품고 숙소로 돌아와, 나는 사랑하는 시인 로베르트 슈만에게 편지를 쓴다.
"2025년 4월, 저의 봄은 그대를 향한 설렘으로 가득 피어났습니다. 그대가 길고 긴 겨울을 버티며 꿈꿨던 봄도 이토록 행복하게 만개했겠지요? 하지만 180여 년이 지난 지금, 제가 바라보는 그대의 봄 뒤로는 슬픔이라는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이미 당신의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대를 사랑하고 나서 저에게 봄이라는 계절은 만개하는 생명이 아니라, 황혼이며 분분한 낙화로 다가옵니다.
꽃봉오리가 터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 당신에게 천사들이 들려준 그 노래를 들으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가엾은 사람. 하이네를 만나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왔을 젊은 날의 그대처럼, 저 역시 당신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이 가장 행복했을 때의 음악과 가장 처절했을 때의 음악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대가 참 보고 싶은 밤입니다."
https://youtu.be/BdsEHD2LzQg?si=mJ5LS66p0K-pzaK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