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 짧고도 찬란했던 신혼의 나날들

라이프치히 슈만 하우스에서 만난 슈만부부의 신혼 이야기

by 조재연

1840년,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는 길고 긴 법정 다툼 끝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들은 라이프치히에서 꿈에 그리던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별다른 사건은 없다.
행복만이 충만하다.

- 로베르트 슈만-

로베르트와 클라라, 그들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이 시기를 저는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어렵게 얻은 사랑을 행복만으로 채울 수 있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요. 세상에 영원한 행복은 없다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이 그토록 뜨거웠기에 이들의 행복이 유난히 짧게 느껴져 인생무상마저 감돕니다.

슈만 부부에게 사랑만이 넘쳐났던 1840년을 떠올리며 라이프치히에 있는 슈만 하우스(Schumann Haus) 앞에 섰습니다. 사랑하는 부부의 집들이에 초대받은 듯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두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깃든 신혼집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

라이프치히의 딸, 클라라


설렘을 가득 안고 들어선 슈만 하우스. 로베르트와 클라라, 두 사람의 달콤한 신혼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시는 클라라 슈만의 삶에 더 깊숙이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제야 다시 돌아가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2019년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이 재개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츠비카우에서 태어난 로베르트에게 라이프치히는 삶의 한때를 보낸 곳이지만, 1819년 이곳에서 태어나 1844년까지 머물렀던 클라라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주인이 '라이프치히의 딸' 클라라 슈만인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

박물관 첫 번째 방에 들어서자, 피아노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구조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클라라의 유년기와 성장기를 다루는 공간으로, 특히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었다.

딸의 비범한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아버지는 클라라에게 말보다 음악을 먼저 가르쳤다. 그 결과 클라라는 네 살이 되도록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니, 딸을 음악가로 길러내는 열정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열정적인 교육을 넘어, 모차르트의 성공 이후 유럽 음악계에 만연했던 '신동 만들기 프로젝트'의 어두운 실체를 보여준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아동 학대에 가까웠다.

어린 클라라와 그녀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비크는 훗날 클라라가 연주로 수익을 얻게 되자, "그동안의 레슨비를 모두 토해내라"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딸을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이자 돈벌이 수단으로 여겼던 그의 모습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어린 클라라에게 일기를 쓰게 하고 매일 검열했으며, 자신이 부르는 대로 내용을 적게 했다. 클라라의 시점으로 본인의 자랑을 넣어두기도 했다니 사생활 침해 역시 심각했다. 그녀는 아버지 동행 없이는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고, 로베르트와 연애를 시작하자 편지를 감시당하며 자유를 뺏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며 감사하다는 글을 남긴 클라라를 보니 가엾기 그지없다. 결혼을 그토록 모질게 반대하며 연을 끊었던 아버지가, 딸과 사위의 성공을 본 뒤 슬며시 용서를 구하자 클라라는 또 그를 용서해 준다. 이를 보며 과연 그녀의 그릇이 태산같이 넓었던 것인지, 아니면 평생을 옭아맨 아버지의 그늘에서 끝내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인지, 그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슈만 '교향곡의 해' (1841)


이쯤에서 꿈에 그리던 결혼에 성공한 슈만 부부의 신혼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힘들었던 부부의 신혼은 평온했다. 음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같이 악보를 분석하며 한 명은 작곡가와 평론가로, 또 한 명은 뛰어난 연주자로 서로에게 없는 면을 채워갔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가던 1841년, 클라라는 슈만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소망은 로베르트가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이에요.

- 클라라 슈만-


일찍이 교향곡 작곡을 고민했던 슈만은 클라라의 응원에 힘입어 작곡을 시작한다. 한 장르를 몰아서 작곡하는 습관이 있던 슈만의 1841년 이 시기를 '교향곡의 해'라고 부른다.

슈만이 교향곡을 쓰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음악 신보'를 들고 빈(Wien)을 방문했을 때, 슈만은 평소 존경하던 슈베르트의 묘지를 찾았고 그의 형을 만나러 갔다. 동생에 대한 애착이 느껴졌던 것일까? 슈베르트의 형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악보 더미를 슈만에게 건네주었고, 슈만은 그곳에서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교향곡 9번을 발견했다. 그 위대한 악보를 본 순간 슈만은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피아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리라."

슈만 교향곡 1번'봄' 악보,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영감을 받은 슈만은 밤낮을 새워 사흘 만에 교향곡 1번 '봄'의 스케치를 완성한다. 이후 1841년 3월 31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된 이 곡은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슈만 교향곡 1번 초연에 대한 기사,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내가 당신의 남편이고,
이렇게 훌륭한 교향곡을 쓸 수 있었으면!

- 교향곡 1번 초연을 들은 클라라 슈만-

탄력을 받은 슈만은 교향곡 2번을 이어서 작곡할 무렵, 첫 딸 마리가 태어난다.


9월의 첫날,
하느님은 클라라를 통해 여자아이를 보내주셨다.
클라라는 산고로 힘들어했다.
난 그날 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 로베르트 슈만-


첫 딸 탄생의 큰 기쁨 속에서 슈만은 사랑하는 클라라의 이름을 모토로 하여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 Op.54'을 작곡한다. 클라라는 이 피아노 협주곡을 아끼며 평생 자신 연주회의 단골 프로그램으로 연주했다.


러시아 연주 여행과 슈만의 우울


이들의 결혼생활은 어여쁜 딸과 함께 행복했지만, 고정적인 직업이 없던 두 사람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두 음악가가 거주하는 집에는 피아노가 한 대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슈만의 창작력이 왕성했던 시기인지라 피아노는 늘 슈만이 차지했다.

그가 자신의 예술에 집중할수록
난 예술가로서 할 일이 점점 작아진다.

- 클라라의 일기-


태생부터 연주자였던 클라라는 무대를 그리워했다. 그랗게 그녀는 연주 여행을 계획했고, 슈만도 이에 동행했다. 라이프치히 슈만 하우스에는 클라라의 연주 여행을 주제로 방 하나를 꽉 채워 전시하고 있다.

클라라의 연주여행 지도,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

연주 여행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위대한 비르투오소 클라라의 연주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각지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했다. 클라라는 더욱 기운이 넘치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남편 슈만은 클라라의 인기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아내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우울해했다. 끝내 슈만은 먼저 라이프치히로 돌아가 딸아이를 돌보며 작곡과 잡지 편집 일에 몰두한다. 혼자 남게 된 클라라는 하는 수 없이 동행을 구해 코펜하겐, 스톡홀름 등을 지나는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이후 클라라는 친구 펠릭스 멘델스존과 상의한 끝에 러시아 연주 여행을 계획한다. 당시 슈만 부부는 멘델스존과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멘델스존이 설립한 독일 최초의 음악학교(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슈만 부부는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고, 멘델스존은 친애하는 클라라에게 자신이 작곡한 '무언가(Song without Words)' 모음집을 헌정하기도 했다.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대학
클라라에게 헌정한 멘델스존 '무언가' ,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이번에도 슈만 부부는 동행했다. 마차를 타고 수십 일을 달려 도착한 러시아. 러시아 황실은 이 부부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이국적인 러시아의 정취는 슈만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고, 그는 이곳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슈만이 그린 모스크바 크렘린 궁,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클라라의 일기에는 당시 황실에서의 경험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클라라 슈만이 겨울 궁전에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를 방문한 이야기를 적은 일기


1844년 3월 24일 일요일 오후 2시에
세 번째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청중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5중주단은 매우 잘 연주했고 특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황후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 모임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황실은 저를 매우 호의적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원을 이루어 황후의 거실에 모였고,
그곳에서도 연주했습니다.
저는 많은 곡을 연주했는데,
특히 멘델스존의 봄노래를
세 번 연속으로 연주했습니다.

- 클라라의 일기 중-


하지만 러시아에서의 환대에 기뻐하던 클라라와 달리, 추운 날씨와 열등감으로 슈만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받은 청중의 환대에 기뻐하면서도 열등감을 느낀 로베르트 슈만이 찌질해 보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나는 그런 그가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아내 클라라가 자신보다 많은 수입과 명성을 얻고 있을 때, 남편으로서, 한 명의 음악가로서 슈만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그리고 남편이 마음껏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연주를 하는 아내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고맙고 미안했을 것이다.

'가장'의 역할과 지위가 절대적이었던 19세기의 사회적 압박은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을 테고, 결혼 과정에서도 장인의 횡포에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와야 했던 과거가 그를 짓눌러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델스존의 성공 앞에서도, 우정과는 별개로 끓어오르는 부러움과 질투심에 괴로웠을 것이다.

슈만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일렁이는 내면의 파도를 음표로 표현하는 그의 음악을 참 좋아하지만, 그 음악에서 깊은 패배감을 들을 때면 가슴이 아리다. 만약 슈만이 좀 덜 예민했더라면, 혹은 배경이 탄탄했더라면 좀 덜 아프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진다. 물론 그런 예민함과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듣는 그의 위대한 음악들이 탄생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클라라의 속상했을 마음도 이해가 간다. 평생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었다면 좀 더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연을 끊으면서까지 슈만을 사랑했고 결혼했다. 남편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자신의 연주 활동을 기꺼이 희생했으며, 가계 수입을 위해 직접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클라라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청중의 환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의 연주에 가장 깊이 공감하며 박수 쳐 줄 단 한 사람, 바로 사랑하는 남편의 따뜻한 인정과 사랑, 그것이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시리다.


실내악의 해(1842), 음악으로 건넨 화해


클라라가 연주 여행을 하던 중, 라이프치히로 먼저 돌아왔던 슈만은 슬픈 마음이었을지 분노의 마음이었을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현악 사중주를 열심히 연구하며 작곡에 몰두했다. 이 해는 그가 실내악을 몰아서 작곡했던 '실내악의 해'가 되었다.

그 격정의 시간 속에, 이 세상 모든 음악 중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두 걸작, 피아노 오중주 Op.44와 피아노 사중주 Op.47이 탄생한다. 현악 사중주를 작곡하는 틈에 '피아노'를 더하여 작곡한 슈만. 슈만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곧 자기 자신이자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다. 나는 이 곡이 소원해진 부부 사이에 슈만이 음악으로 건네는 진심 어린 화해의 메시지라고 믿는다.

어려운 과정을 견디고 결혼식을 올리면서 "나의 선한 영혼과 나보다 더 나은 나"라고 클라라에게 했던 고백. 슈만은 그 뜨거웠던 순간을 분명 떠올렸을 것이다. 1843년 1월, 위대한 피아노 오중주는 클라라의 피아노 협연으로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되었고, 악보는 클라라의 생일 9월 13일에 맞춰 출판하여 아내에게 헌정했다. 클라라는 이 화해의 손길에 감격했었던 것일까? 그녀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과 더불어 이 곡을 평생 아끼고 자주 연주했다.

슈만 피아노 5중주 Op.44를 클라라가 협연한 프로그램,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 거실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에서는 종종 살롱음악회를 여는데, 나는 슈만 부부가 살았던 집, 바로 그 거실에서 그의 걸작, 피아노 사중주 Op.47을 들을 수 있었다. 벽에 걸린 슈만 부부의 부조가 붙어 있는 거실에서 현악기들의 느린 서주로 곡이 시작되고, 이내 피아노가 조심스럽게 등장한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면, 그런 상상을 한다.

갓 완성된 악보를 손에 든 슈만이 친구인 멘델스존과 요아힘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는 함께 연주해 보자며 설레는 목소리로 제안하고 멘델스존이 비올라를, 요아힘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클라라가 하던 일을 멈추고 피아노 앞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격렬한 감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2악장이 지나고, 첼로를 든 슈만은 마침내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Andante Cantabile)'에서 그의 진심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슈만이 건네는 화해의 손길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아힘을 거쳐 드디어 클라라에게 닿고, 마침내 그녀가 그 화해를 받아들이는 순간, 네 개의 악기는 하나가 되어 사무치게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빚어낸다.

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 거실에서 연주된 슈만 피아노 사중주 Op.47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순간이다. 어쩌면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를 바로 그 역사적인 공간에서 이 선율을 마주하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나의 심장, 하나의 영혼으로'


라이프치히 슈만 하우스에 소장 중인 유일한 진품, 클라라의 핀쿠션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 보려 한다.

클라라가 결혼 후 사용한 물건들에는 그녀의 이니셜 'CS'가 새겨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C와 S가 서로를 감싸듯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게 의미 부여할 것 없이 남편의 성을 따른 서양 문화의 일부이고 그저 디자인적인 요소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이니셜 문양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둘의 사랑을 느낀다. 로베르트 슈만 사후에도 평생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의 악보를 출판하는 일에 힘을 쓰며 이 문양을 평생 애용했던 클라라의 사랑에 가슴이 미어진다.

클라라 슈만이 사용하던 핀쿠션(라이프치히 슈만하우스)

마지막 전시실에는 이들 부부의 8남매 아이들에 대한 소개 영상과 함께 '어린이 정경'과 '시인의 사랑'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미래의 클라라를 꿈꾸며 사진을 찍은 어린아이의 모습까지 더하니, 8남매를 남겨두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로베르트 슈만의 슬픔이 느껴진다.

로베르트 슈만이 아이들과 놀아줄 때 사용하던 장난감, 츠비카우 슈만하우스

문득 츠비카우에서 보았던,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던 낡은 장난감이 떠오른다. 음악 속에서는 그토록 고뇌했지만, 그는 분명 아이처럼 순수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슈만 부부가 가장 행복했을 신혼의 4년이 담긴 라이프치히 슈만 하우스. 이곳에서 이들 부부의 사랑 이야기와, 슈만이 그토록 꿈꿨을 화목한 가정을 느껴본다.


먼 훗날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의 심장,
하나의 영혼으로 기억할 것이다.

- 로베르트 슈만-

https://youtu.be/I7HQ1SVWE3o

피아노 사중주 Op.47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