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에서 만난 슈만의 고독
클라라와 러시아 연주 여행을 다녀온 로베르트 슈만의 몸은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악화된 건강 탓에 의사는 "작곡을 중단하고 쉬어야 한다"라고 권유했지만, 슈만의 불타오르는 창작욕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컨디션이 조금만 나아져 앉을 힘만 생기면 펜을 잡았다.
이 시기, 병마와 싸우며 슈만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은 바로 '파우스트의 장면들(Szenen aus Goethes Faust), WoO 3'이었다.
그 음악이 괴테 텍스트의 의미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때,
나는 정말 기뻤어요.
'그렇게 완벽한 시에 음악을 붙였다면서
그 핵심이 도대체 뭡니까?'
라는 비난을 듣지나 않을까 두려웠거든요.
- 로베르트 슈만-
괴테와 슈만. 독일 예술을 지탱하는 두 거장 사이에는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16살의 젊은 괴테는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훗날 슈만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분방한 감수성을 지녔던 그에게 딱딱한 법학은 맞지 않는 옷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법전 대신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당시 '작은 파리'라 불릴 만큼 활기 넘쳤던 라이프치히에서 괴테는 다양한 예술을 접하며 문학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젊은 날의 방황과 열정이 서린 그 도시의 기억은 훗날 그의 위대한 걸작 '파우스트'에 녹아들게 된다.
슈만이 그토록 천착했던 '파우스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난 라이프치히 여행기에서 잠시 언급했던 괴테의 흔적을 다시 이야기해 본다. '아우어바흐 켈러(Auerbachs Keller)'이야기다.
1525년부터 이어져 온 이곳은 괴테가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토론을 벌이던 아지트였다. 바로 이곳에서 괴테는 필생의 역작 '파우스트'의 영감을 얻었다.
입구에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를 유혹하는 조각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한 파우스트, 그리고 그에게 쾌락을 제안하는 교활한 악마의 모습이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엄청나게 큰 홀이 나온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술통을 타고 있는 파우스트 박사의 모형이 있다. 괴테가 이곳을 드나들던 시절, 벽에 걸려 있던 '파스리트(술통 타기)' 전설 그림이 그의 창작욕을 자극했다고 한다.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이 담긴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이곳에서 괴테가 마셨던 고제(Gose) 맥주를 마시며, 잠시 그가 되어보았다.
선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
- 괴테, '파우스트' -
그렇다면 슈만은 왜 이토록 괴테의 이야기에 빠졌던 것일까. 잠시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짚어보자. 평생 학문을 탐구했으나 삶의 허무함에 빠진 노학자 파우스트에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온다. 악마는 그에게 세상의 모든 쾌락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영혼을 건 내기를 건다.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1부), 정치와 예술을 넘나들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한다(2부). 그리고 마침내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삶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구원받는다. 욕망과 타락,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 끝에 구원을 얻는다. 이 장대한 서사는 인간 삶의 축소판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괴테의 '파우스트'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토벤, 리스트,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같은 거장들이 이미 이 소설을 주제로 음악을 만들었다. 깊은 문학도였던 슈만에게도 '파우스트'는 반드시 음악으로 완성해야 할 일생의 과업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병마의 고통 속에서도 사명감 하나로 무려 10년에 걸쳐 이 대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는 파우스트의 주제처럼, 슈만의 삶 역시 수많은 방황과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아갔다. 음악적 재능을 펼치려다 좌절했고,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으며, 사랑조차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슈만은 끊임없이 고뇌하고 방황했던 파우스트 박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병마와 싸우고 있던 슈만의 이야기다. 슈만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창간하고 열정을 쏟았던 '음악 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의 편집장 자리마저 내려놓아야 했다.
당시 그를 진료했던 헬비어 박사의 기록을 보면, 슈만이 겪었던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정신적 행위를 시작하면,
슈만은 바로 몸을 떨고 소심해졌으며
발이 차가워졌다.
불안한 감각이 밀려왔고,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걱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높은 산이나 건물에 올랐을 때
느끼는 공포의 형태였으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 슈만을 진료한 헬비어 박사-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자, 클라라는 라이프치히에서 기차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드레스덴(Dresden)으로 이사를 제안했다. 드레스덴은 온천이 발달해 있어 요양에 도움이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나도 슈만의 새로운 시작을 따라 라이프치히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고,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리는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유유히 흐르는 엘베 강물 위로 고풍스러운 다리들이 놓여 있고, 그 너머로 츠빙거 궁전과 프라우엔 교회 같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드레스덴의 자랑인 젬퍼오퍼(Semperoper)는 건물만으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이곳에 상주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KD)는 클래식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세계적인 악단이다. 슈만은 이곳에서 당시 작센 궁정 악단 음악감독을 맡고 있었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 슈만은 바그너에 대해 "그의 머리는 아이디어로 꽉 차 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오래 듣고 있을 수는 없다"라고 평했고, 바그너는 슈만을 "재능은 있지만, 함께 앉아서 얘기하기 힘든 과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젬퍼오퍼를 바라보며 극명한 성격 차이가 느껴지는 이 에피소드를 떠올리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드레스덴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1847년 슈만에게 또 한 번의 큰 슬픔이 닥쳐왔다. 그해 5월, 절친했던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났고,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6월, 사랑하는 아들 에밀이 돌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마냥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 없었다. 다름 아닌 그 해 7월, 고향 츠비카우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슈만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이들과 친구를 잃은 비탄 속에서도 슈만은 축제에 참여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많은 이들의 박수와 위로 속에서 그는 비로소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츠비카우 게반트하우스 앞 광장에는 고뇌하는 듯한 모습의 로베르트 슈만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상의 시선을 따라가면 슈만 축제가 열렸던 츠비카우 게반트하우스가 보인다.
음악가에게 자신의 이름을 건 축제가 열린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다. 하지만 팔을 괴고 기대어 있는 슈만의 동상에서는 환희보다는 깊은 상실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축제가 열렸던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비극 속에서도 음악을 향한 그의 집념을 말해주는 듯하다.
참 슬픈 일이다. 츠비카우 광장에 서서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만약, 사랑하는 아들 에밀과 파니 멘델스존, 그리고 펠릭스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축제를 성황리에 마치고 슈만의 건강이 조금은 더 회복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슈만에게 다가오는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축제가 끝나고 불과 4개월 뒤, 그의 친구이자 위대한 음악가였던 펠릭스 멘델스존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슈만은 직접 그의 운구를 하며 가장 소중한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 이별 앞에서 슈만은 그동안 쌓였던 모든 슬픔을 토해내듯 많은 눈물을 흘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복잡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로베르트 슈만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 이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음악적 재능을 펼치고자 베버를 만나러 드레스덴에 갔을 때는 길이 엇갈렸고, 늦게 시작한 피아노 연주에 열정을 쏟으려니 불의의 손가락 부상이 그를 좌절시켰다. 클라라와의 뜨거운 사랑조차 결혼하기까지 법정 투쟁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괴테의 '파우스트' 속 문장처럼, 슈만의 삶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나아갔지만 동시에 수많은 방황과 고난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깊은 절망 속에서도 그는 다시 일어섰다. 사랑하는 이들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축제를 통해 위안을 얻고 다시 펜을 들어 창작의 의지를 다졌다.
슈만의 음악에는 복잡하고 처절한 그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낭만적인 사랑의 설렘과 동시에 깊은 내적 고독이 드리워져 있으며, 때로는 어두운 내면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기도 하지만, 그는 기어이 그 속에서 찬란한 환상을 노래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슈만의 음악이다.
슈만은 자기와 음악이 하나예요.
물론 작곡가들의 작품은
자기를 고백하는 면이 있지만,
전체 작품이 자기와 하나로 되어있다는 점이
슈만의 특별한 점이 아닐까 해요.
- 피아니스트 백건우-
슬픔을 승화시키려 했던 것일까? 슈만의 창작욕은 나날이 커져갔다. 이 시기에 작곡한 곡 중 슈만의 유명한 작품 '숲의 정경(Waldszenen), Op.82'을 소개해본다.
총 9개의 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표제부터 지극히 낭만적이다. 친구 멘델스존의 회화적인 음악처럼 자연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산들바람 속 단잠에 빠지는 듯한 목가적인 1곡을 시작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길을 산책하는 듯한 5곡,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숲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6곡을 지나 마지막 9곡 '작별'에 다다르면, 누군가를 떠나보낸 헛헛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나는 엘베 강을 바라보며 '숲의 정경'을 들었다. 따뜻한 햇살과 산들산들 부는 강바람이 참 좋다. 하지만 이 곡을 듣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슈만의 울적함이 들리는 듯하다. 마침 시야에 가족 나들이를 나온 한 가족이 들어왔다. 그들의 웃음 가득한 모습을 바라보니, 사랑하는 아들 에밀을 잃었던 슈만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헤아려보게 된다.
7곡 '예언하는 새(Vogel als Prophet)'를 지나 '숲의 정경' 마지막 곡 '작별(Abschied)'에 다다랐다. 절친한 친구 멘델스존의 '무언가(Lieder ohne Worte)' 같은 느낌이 드는 이 곡은 밝지만 마냥 밝게만 들리지 않는다. 이 곡의 제목 '작별'에 그가 의지했던 친구 멘델스존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떠난 아들 에밀을 향한 인사가 담겨있는 듯 느껴진다.
슈만이 고통받던 1848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레스덴 혁명이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슈만 부부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드레스덴을 잠시 떠나야 했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슈만은 대신 작곡을 통해 자신의 의견과 시대정신을 표현했다.
몸은 점차 아파지고 우울감은 깊어지던 이 시기에, 슈만은 라인강의 도시, 뒤셀도르프(Düsseldorf)로부터 음악감독 제안을 받는다. 뒤셀도르프는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로 오기 전 근무했던 곳이다. 슈만은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태어나고 자랐던 작센 지방을 떠나 라인강이 흐르는 뒤셀도르프로 향한다.
슈만은 친구 멘델스존의 곡 중 피아노 3중주 Op.49 2악장을 좋아했다.
그가 좋아했던 친구 멘델스존의 곡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그대의 놀라운 모습 내 마음속에 있네.
그 신선하고 행복한 모습 언제나 내게 보이네.
내 마음 조용히 노래하네.
그 옛날의 아름다운 노래,
그 노래 공기에 실려 그대에게로 가네.
- 슈만 가곡 <리더크라이스> Op.39 중 '인터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