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비카우에서 만난 슈만
낭만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입에 오르내리는 요즘, 우리 시대는 상처가 많은 듯합니다. 눈부신 기술 발전과 숨 막히는 경쟁으로 점철된 현대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따스한 인류애가 희미해지고 깊은 소외감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낭만을 갈망하는 지금은,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인간적 가치를 그리워하는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을 다녀오고, 그 감동을 글로 옮기려 마음먹은 주말이었습니다. 막상 글을 쓰려하니, 가슴 벅찬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도무지 첫 문장이 써지지 않더군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들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가다 보니,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티 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는 듯했습니다.
슈만은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련한 유년 시절의 추억과 순수함을 이 곡에 담아냈습니다. 그 맑고 투명한 선율 속에서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마치 사소한 것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놀이터의 아이들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즐겁게 바라보는 그 순수한 시선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말입니다.
꿈을 지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때로 부딪혀 상처 입을지언정 뚜벅뚜벅 나아가는 용기가 낭만이고, 그것이 곧 슈만이 우리에게 들려준 삶이었습니다.
슈만이 작가 장 파울에 대해 남긴 말을 떠올려봅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마음속으로 먹구름이 밀려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그렇지만 평화의 무지개와 인간 본연의 강인함이 내게 달콤한 눈물을 흘리게 하고, 고통을 이겨낸 심장은 한없이 깨끗하고 부드러워져."
슈만이 장 파울의 글 끝에서 정화를 발견했듯, 저 또한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의 음악은 때론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을 마주하게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세상을 다시 따스하게 바라볼 힘과 맑아진 영혼을 선물합니다. 낭만을 갈망하는 이 시대에, 슈만의 음악은 길 잃은 우리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그 등불을 따라간 이번 여행, 츠비카우에서 품었던 한 소년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https://youtu.be/T34Wxq0SLNA?si=1O1FmWf8ff6H4tLz
꼬마 로베르트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작센주의 작은 도시 츠비카우(Zwickau)에 도착했다.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고 구도심으로 향하는 길, 슈만 하우스와 가까워질수록 마치 그의 음악처럼 심장 박동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나의 영혼을 수없이 어루만져 준 시인이 태어난 바로 그곳, 슈만 하우스(Schumann Haus)다. 입구에 다다르니 너무 떨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첫사랑에게 고백하러 가는 길목에 선 것처럼,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이다 깊은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첫발을 내딛자마자 벽면을 장식한 한 점의 부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로베르트와 클라라, 두 사람의 옆모습이다. 수많은 밤, 내 마음을 흔들고 또 위로했던 이 부부를 드디어 마주한다. 슈만과 친분이 깊었던 조각가 에른스트 리첼이 만든 이 부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원래 리첼은 당시 남편보다 유명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를 앞쪽에 배치하려 했다. 하지만 로베르트는 "창조하는 예술가가 재창조하는 예술가(연주자)보다 앞에 나와야 한다"며 본인을 앞에 세울 것을 고집했다고 한다. 아내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천재적인 아내의 재능을 질투했던 로베르트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여 슬며시 웃음이 났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본격적인 전시가 펼쳐지는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자 여러 개의 슈만 흉상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인물의 흉상이었다면 그 무게감에 주눅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평소 슈만을 사랑하는 내게는 오히려 따뜻한 환대처럼 느껴져 반가움이 앞섰다.
전시실에 들어서고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1810년 6월 8일, 바로 이곳에서 아우구스트 슈만과 크리스티아네 슈만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 로베르트가 태어났다.
작가를 꿈꿨던 아버지 아우구스트는 이곳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문학의 향기를 나누었고, 어머니 크리스티아네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 아버지의 서점은 슈만에게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그는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고, 직접 시와 소설을 습작하기도 했다. 문학을 사랑한 아버지의 감성과 음악을 사랑한 어머니의 재능은 어린 슈만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어 훗날 그가 '음악의 시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쿤치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훗날 슈만은 스승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를 좋아해 준 훌륭한 선생님이다.
하지만 연주자로서는 평범했다.
일곱 살의 슈만은 이미 자신에게 더 넓은 음악의 바다가 펼쳐져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던 1819년, 카를스바트에서 열린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연주회는 소년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보여준 압도적인 연주에 감동한 슈만은 훗날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기억나세요?
그때 어머니는 제게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바로 뒤에 있다고 말씀해 주셨죠.
그분은 많은 사람이 영예스럽게 떠받드는 가운데
아주 겸손하게 청중 사이로 걸어 나갔어요.
모든 면에서 그분을 롤 모델로 삼고 싶어요.
모셸레스의 겸손함과 빛나는 연주는 어린 슈만에게 음악가로서 나아갈 꿈을 품게 해 주었다.
전시실에서 어린 슈만의 흔적을 보다 보니, 그가 실제로 걷고 숨 쉬었던 거리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나는 직원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박물관을 나와 츠비카우의 구도심을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슈만의 흔적들은 하우스에서 불과 2분 남짓한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성 마리아 교회(St. Marienkirche)'였다. 11세의 소년 슈만이 스승 쿤치의 지휘 아래 오라토리오 '최후의 심판' 피아노 반주를 맡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던 역사적인 장소다. 고요한 교회 앞에 서니, 떨리는 손으로 건반을 눌렀을 어린 슈만의 긴장감과 설렘이 전해지는 듯했다. 그는 금세 츠비카우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아들이 불안정한 음악가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슈만이 열심히 공부했던 '리체움 학교(Lyzeum)'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곳에 기대감을 안고 도착했지만, 아쉽게도 학교는 온통 공사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나 아쉬움에 서성이던 그때, 학교 관계자로 보이는 분과 마주쳤다. "혹시 이곳에서 슈만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요?" 나의 물음에 그분은 잠시 생각하더니 친절하게 공사 자재들 사이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그 덕분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배 로베르트 슈만'을 기념하는 현판을 마주할 수 있었다. 리체움의 후배들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선배를 마음 깊이 추억하고 있었다.
다시 슈만 하우스로 돌아와, 그의 청춘을 들여다보았다. 전시된 자료 중에는 12세 때의 놀라운 일화도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리기니(Righini)의 악보를 발견한 어린 로베르트가 오케스트라 버전이었던 악보를 단숨에 관현악 편성으로 편곡해 친구들과 연주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천재성을 확인한 아버지는 그를 위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 베버에게 유학을 보낼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베버의 갑작스러운 런던행으로 유학이 무산된 데 이어, 슈만의 누나 에밀리아가 세상을 떠났고, 충격에 빠진 아버지 아우구스트마저 1826년 연이어 세상을 등지고 만다. 슈만의 첫 번째 일기장에는 당시의 처절한 슬픔과 혼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이 깊은 사람은 아니라서 그런지, 너무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처럼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그놈의 운명을 저주했다. 능력 있는 경영인이고 인간의 본성을 예민하게 관찰한 분이시며, 멋진 시인이고 따스한 사랑을 베푸신 아버지이신데, 그런 분을 나에게서 빼앗아가다니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렇게 깊은 슬픔과 혼란의 시기를 지나던 슈만에게도 새로운 감정의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 슈만은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했다. 그의 삶에 첫사랑의 애틋한 설렘을 안겨준 이는 아그네스 카루스였다.
이 만남은 음악 애호가였던 이웃, 에르트만 카루스 씨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집은 어린 슈만에게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세계를 처음 열어준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슈만은 에르트만의 조카 아우구스트 카루스를 알게 되었고, 그의 아내 아그네스를 만나게 되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슈베르트의 가곡을 노래하던 아그네스. 슈만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줍은 소년의 가슴에 떨리는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강렬한 열정은 곧바로 창작으로 이어졌다. 슈만은 이 시기에 13곡에 달하는 가곡을 써 내려갔다.
그의 섬세한 감성이 녹아든 'Lied für XXX'는 이 사랑 속에서 태어났다.
사랑의 열병과 함께 슈만의 영혼을 채워준 것은 문학이었다. 아버지의 서점에서 괴테, 실러, 장 파울, E.T.A. 호프만을 탐독하던 그는 책 속의 세계를 실제로 경험해보고 싶은 열망을 가졌다. 슈만은 16세부터 20세까지, 친구 로젠과 함께 튀링겐, 프라하, 뮌헨, 이탈리아를 거치는 문학 기행을 떠났다.
특히 뮌헨에서는 그토록 존경하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직접 만났다. 훗날 그의 위대한 연가곡 '시인의 사랑'의 원천이 될 시인과의 만남이었다.
하이네를 만나 설렜던 슈만의 마음을 그가 쓴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이네 씨를 투덜거리기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는 남자겠거니 하고 막연하게 상상했는데, 제가 본 모습은 완전히 달랐어요. 그는 마치 인간적인 그리스 시인 아나크레온처럼 친절하게 다가왔어요. 정답게 악수를 하고, 저를 데리고 몇 시간 동안 뮌헨을 보여주었지요.
자신의 우상을 좇아 길을 나섰던 슈만의 여정에, 문득 지금 나의 여행과 겹쳐본다. 그가 하이네를 만나기 위해 뮌헨으로 향하며 느꼈을 그 설렘은, 슈만을 만나기 위해 지금 독일 땅을 밟고 있는 나의 마음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의 여행이 슈만이라는 거장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듯, 그의 거대한 등을 바라보며 걷는 지금의 내 발걸음 또한 훗날 인생의 깊은 깨달음으로 남기를 바란다.
문학 기행을 마치고, 슈만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여행하던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저명한 법학자 티보 교수를 만나 그를 잘 따르게 되는데, 사실 법학보다는 티보 교수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 모임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이 시기,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 작품 번호 1번 '아베크(ABEGG) 변주곡'이다. 가상의 여인 이름인 '아베크'의 철자(A-B-E-G-G)를 음이름(라-시♭-미-솔-솔)으로 바꾸어 주제 선율로 삼은 이 재치 있는 곡에서, 우리는 슈만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과 음악적 재능이 얼마나 아름답게 결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183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목격한 것이다. 그 초인적인 기교와 폭발적인 에너지는 청년 슈만의 심장을 관통했다. 박물관에서 슈만이 소중히 간직했던 파가니니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파가니니의 연주에 압도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열망을 숨길 수 없었다. 음악만이 자신이 가야 할 길임을 확신한 슈만은 불타는 결의를 담아 어머니에게 절박한 편지를 쓴다.
어릴 때부터 저를 이해해 주시고 음악이든 어떤 다른 예술이든 시켜보려고 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 어머니 마음속에 있는 것과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평생 동안 그런 진절머리 나게 단조로운 것을 제가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건지 자문해 보세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제가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되세요?
아들의 재능과 음악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안정된 삶을 바랐던 어머니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아들이 험난한 예술가의 길 대신 안정적인 법학을 공부해 주길 바랐던 소망이 있었던 어머니는 깊은 상심 속에서 아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그의 결심을 눈물로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에 담긴 아들의 간절함과 확고한 의지를 본 어머니는, 무작정 반대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는 슈만이 피아노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라이프치히의 저명한 피아노 교육자,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의 재능에 대한 평가를 구하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한 비크의 답장은,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제가 아드님을 맡아 지도하겠습니다.
그의 재능과 상상력으로 보건대
삼 년 안에 지금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중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허락을 받은 슈만은 기쁜 꿈을 안고 음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곧장 라이프치히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운명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스승 비크 교수의 딸이자, 훗날 음악사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처절한 사랑의 주인공이 될 천재 소녀, 클라라였다.
츠비카우 슈만 하우스는 슈만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거대한 보물창고와 같았다. 1910년, 슈만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뜻을 모아 만든 이곳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슈만 사후 불과 54년 만에 그를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에서, 츠비카우 시민들이 이 위대한 예술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스위스에 살던 슈만의 딸, 마리 슈만이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소중한 유품들을 대거 기증해 준 덕분에 이곳의 전시는 놀라울 만큼 생생했다. 예를 들어, 슈만이 실제로 사용했던 책장이 특별한 보호막도 없이 무심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는 마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무려 8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돌아보곤 했다.
이토록 방대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꼼꼼하게 살피던 내 모습이 인상 깊었던 걸까. 한 직원분이 다가와 "슈만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라며 따뜻한 미소와 함께 영어로 상세히 소개된 가이드북을 선물로 건네주었다. 독일어를 알지 못해 번역기와 씨름하며 더듬더듬 관람하던 내게는 정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선물이었다. 그 책자 덕분에 남은 시간 동안 훨씬 더 깊이 있게 전시를 이해하고 슈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 받은 순간도 있었다. 전시실에 고즈넉이 놓여 있던 슈만 시대의 피아노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직원분이 다가와 조심스레 연주해 보라고 권한 것이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지 못하는 나는 머뭇거리다 떨리는 손으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살짝 쳐보았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슈만의 숨결이 깃든 공간에서 그의 시대 악기를 직접 만져보고 소리를 내보았던 그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슈만을 향한 내 마음을 알아본 그분들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츠비카우에서의 경험은 더욱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다.
로베르트 슈만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그의 삶과 음악의 진정한 향기를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이곳 츠비카우 슈만 하우스는 분명 평생 잊지 못할 깊은 울림과 영감을 선사할 것이다.
이곳에서 마주한 방대한 자료와 가슴 뛰는 이야기들은 앞으로 내가 이어갈 '로베르트 슈만 여행기'의 소중한 밑거름이 될 예정이다. 그의 삶의 중요한 장소들을 따라가며, 이곳에서 만난 감동과 기록들을 하나씩 정성껏 풀어낼 테니, 나의 다음 슈만 이야기도 많이 기대해 주길 바란다.
슈만은 나의 이상
-에드워드 엘가-
https://youtu.be/wZ9jtthFQo8?si=Vhvz5e_fKb9EouZ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