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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와 게이지 May 27. 2024

서른여덟 또는 마흔, 쓰기와 뜨기.

편지 쓰는 마음


아이가 어버이날이라고 유치원에서 카네이션이 장식된 카드를 써왔다. 누가 봐도 선생님이 알려줬을 법한 내용의 카드를 써왔지만, 글씨만은 영락없이 아이의 글씨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정말 고맙다고 아이에게 폭풍칭찬과 함께 감사인사를 전했더니 아이가 우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또 써주겠다고 한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책상으로 가 색종이를 꺼내고 색연필을 꺼내더니 유리테이프까지 이용해서 편지봉투도 만들고 편지도 써서 선물로 준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매번 가져온 카드지만 올해는 뭔가 다르다. 어버이날의 의미도 아는 것 같고 비록 스스로 생각해 낸 내용은 아니더라도 카드에 쓰인 내용도 아는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주니까 배달한다'라는 느낌이었다면 올해는 '이걸 주면 엄마 아빠가 좋아하겠지?'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느껴지니 괜히 아이의 성장을 목도한 순간 같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이 찡- 하다. 이렇게 감동받은 채로 일주일을 보내다 스승의 날을 맞아 아이에게 담임선생님에게 카드를 쓰자고 제안했다. 아이는 흔쾌히 그러자고 하더니 열심히 공을 들여 카드를 꾸미기 시작한다. 식탁에 굴러다니던 빵포장지에 그려져 있던 카네이션그림을 보고 카드앞장에 따라 그리기 시작하더니, 자기는 좀 더 잘 그려야겠다고 배경까지 생각해서 종이 한 면을 꽉 채워 채색했다. 그래도 안에 쓸 내용은 스스로 생각하기 어려운지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최대한 쉽게 '사랑해요. 감사해요'라고 적는 건 어떻냐고 제안했더니 "오, 좋아~" 이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카드 안 쪽에 글 쓰기 전 줄을 긋고 줄에 맞춰 글을 쓴다. 뭔가 신기하다. 그냥 대견하기만 한 기분이 아니고 신기한 기분이 든다. 정말 내 아들 맞네 싶은 그런 신기한 기분.


 나에게는 편지친구가 있다. 20살 때부터 시작되어서 아직까지도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들이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어쩌다 화제가 흘러 나의 편지친구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다들 신기해한다. 그런 반응을 몇 번 겪다 보니 꽤 신기한 일인가 싶다. 그렇지만 그전에는 크게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에게도 편지친구가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도 며느리에게 쌀과 함께 짧은 편지를 써 보냈으며, 또 내가 편지를 써 보내면 뭐 이런 걸 쓰냐고 핀잔주는 이도 있었지만, 답장 주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정적인 편지친구는 20살 이후에 생겼지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종종 편지를 썼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 아이보다 한 살에서 두 살 정도 많았을 때부터. 처음 편지 쓰는 대상은 당연히 부모님이었다. 학교에서 시켰던 어버이날 편지 쓰기가 그 시초가 아니었을까?


많은 것이 전자화된 현대에 이르러 편지지에 손글씨로 편지를 쓰고 굳이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결제하고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 다른 이들에게 '아직도 그런다고?'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편지 쓰는 행위'에 대해서 내가 남들보다 조금 특별난 점이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한슬아, 서랍을 정리하는데 네가 어릴 때 써준 카드랑 편지들이 보이더라. 하나랑 미리는 써준 적이 없는데, 한슬이는 매년 어버이날에 편지를 써줬지. 그걸 서랍정리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어."


어머니는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어버이날 편지를 써라는 미션은 모두가 받는 것이었을 텐데 그 편지를 정성스럽게 써서 정말로 전달한 것은 나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알록달록 예쁘게 색칠하는 게 좋아서 가위질하는 게 재밌어서, 요리조리 접어 편지봉투 모양을 만들거나 예쁜 모양을 만드는 게 재밌어서 집에서도 한참을 공들여 만들어 어머니께 드렸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학창생활을 거치면서도 참 열심히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줬었다. 다시 돌아오는 편지들이 없어서 대부분 일회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적었다. 대학가서도 동기들에게 얼마나 적었던가. 군대 간 동기들에게도 공들여 정성 들여 펜색을 바꿔가며 색연필로 꾸며가며 편지를 적어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게 답장을 줬던 동기언니 한 명이 내 마음속 특별한 사람이 되었고, 내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줬던 그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들이 아직까지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날을 맞이해 선생님께 열심히 카드를 적던 아이가 갑자기 엄마 아빠보고 자기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주문을 한다. 어릴 때 어머니께 드렸던 어버이날 카드를 떠올리며 색종이도 오리고, 편지봉투도 직접 만들어가며 카드에 가까운 편지를 써서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편지를 받아 들고 기분이 좋은지 소리 내서 읽더니 또 써달라고 주문을 한다. 이번주에만 엄마에게 두 번 아빠에게 한 번 편지를 받아냈다. 아이가 받고서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엄마가 만든 편지봉투를 흉내 내서 아빠에게 편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니 그것도 참 기특하고 귀엽다. 그리고 아이를 계속 눈으로 좇게 된다. 지금 이 아이는 무슨 마음으로 편지를 써달라고 하는 걸까? 무슨 마음으로 편지를 써주는 걸까? 편지를 여러 번 쓰다 보면 목적은 매번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처음 편지를 쓸 때는 난 늘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 편지를 받고 이 사람이 기운이 나길. 기분이 많이 좋아지길. 내가 이렇게 많이 자기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좋아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나는 분명 그런 마음으로 어머니께도, 친구들에게도, 동기들에게도 그리고 아이에게도 편지를 썼던 거라고. 편지 쓰는 아이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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