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사용
나의 몸 사용
나의 몸은 음력 19**년 *월 5일,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엄마 아버지가 결혼 후, 4년을 기다려 나를 낳았다고 한다. 누구나 그렇듯 빈손으로 왔지만, 귀하신 몸이었고, 온갖 좋은 이름을 가져다 놓고 두 분이 고심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경란과 혜경을 두고 서로 이야기 나누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경란으로 지으셨다고 한다. 서울의 난초로 이쁘게 살아가라는 마음을 보태어 이름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은 가냘프고 고급스러운 서울 난초와 다르게, 먹성이 좋아 먹을 것만 보면 달려들어 먹어 대 어릴 때부터 뚱뚱했다고 한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내 몸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얼굴 모습은 호빵같이 둥글넓적, 눈도 작고 콧날도 오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방학에 시골 큰집에 가서 사촌 오빠들을 만나면
“눈 좀 뜨고 다녀!!”
라며 놀려대었고, 내가 옆에 앉아 있기라도 하면
“코가 더 나와야 해.”
코가 아프도록 잡아당기며 장난치기가 일쑤였다. 나는 삐져서 오빠한테 달려들거나 큰엄마께, 할머니께 일러바치곤 했다. 그래도 엄마 아버지를 아는 분들은 귀엽다고 해 주니 그것을 이쁘다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즐겁게 지낸 것 같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나와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키도 크고 날씬하다.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린다. 사람들은 “둘이 사이좋게 지내며 옷도 비슷하게 입고 다니면서 둘이 쌍둥이같이 다닌다”라고 하니 정말 쌍둥이 같은 줄 알았다. 내 몸의 주제를 몰랐던 것이다. 어디서든 나서고 나를 나타내기 위해 종알거리고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초등학교 전학을 두 번, 중학교 전학을 한 번, 전학을 많이 다니면서도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전학 온 첫날, 교무실에서
“지금 전학해 오는 애들이 여고 입학률 떨어뜨린다.”
하며 전학생이 된 나에게 했던 어느 여교사의 불편한 말 한마디는 나를 힘들게 했고, 내 몸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고가 치열한 입시를 거쳐서 가게 되는 지역의 명문이라고 하지만, 그 교사 말처럼 입학률 떨어뜨리지 않았고 합격했다. 3학년 2학기는 전학생인 나를 반겨주지 않는 학교에 와 있었다는 것에 우울했고, 뚱뚱한 내 몸에 대해서 힘들어했던 시기가 되었다. 그게 나에게는 사춘기의 힘든 한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은 우리 집 앞을 지나가야 내가 다니는 AD여자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등·하교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올라가고 내려온다. 그 아이들을 보며 어느 날, 내가 아버지께 뻔한 질문을 했다.
“저기 올라가는 애들 중에 누가 제일 예뻐요?”
“누가 제일 예쁘겠니? 경란이가 제일 예쁘지.”
빙긋이 웃으며 답해 주셨다. 나는 그 기억으로 행복해졌다. 사춘기가 되면서 내 몸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뚱뚱하고 보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로 나는 내가 좋았다. 그 몸을 나는 사랑한다. 거울을 보고 매일 들여다본다. 매일 씻고 닦고 보호해 준다. 아버지가 주신 몸이다.
아버지가 주신 귀한 내 몸에 대해, 60년 이상을 함께 하면서 별다른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이제, 내 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내 몸도 사용기한이 있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날날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내 몸을 맘껏 쓰고 있었다. 영원히 내가 쓸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몸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 겉보기에는 열심히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몸을 좀 더 잘 가꾸며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도 많다. 먹을 것을 끊임없이 주어야 한다. 좋은 먹거리를 주기 위한 준비물들이 부엌 가득하다. 도구들도 너무 많다. 그 도구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친환경제품이니, 유기농 제품이니 하며 내 몸을 위해 좋은 먹거리를 아낌없이 주기도 한다. 내 몸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입혀 주어야 할 옷들도 너무 많다. 옷장 가득하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으면서 내 몸이 언젠가 필요로 할 날이 있을 거야 하며 보관하고 있는 옷들까지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몸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쉬기 위해서도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 내 몸에 입혀주었던 외출옷을 깨끗이 하겠다며 스타일러를 들여놓았고, 내 몸이 당장 편안히 앉도록 소파, 안마의자를, 찜질하겠다고 찜질 기구까지 집을 가득 채워두고 있다. 물론 내 몸을 잘 쉬게 하기 위한 집이 있어서 마음껏 들락거리게 하고 있다. 심지어 내 몸에 좋은 공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공기 좋은 양평에 작은 세컨드하우스도 하나 대여해 놓았다. 영원히 내 몸을 사용할 것처럼 말이다.
퇴직하면서 함께 했던 동료 몇몇 분이 함께 하자 하여 교육을 받게 된 대한웰다잉협회에서 사람들의 삶에 관한 많은 간접경험들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를 내 몸과 객관적으로 분리시켜 보고 싶어졌다. 내 몸 사용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젠, 내 몸 사용마감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다. 내가 내 몸을 떠나는 날을 대비해 내 몸을 위해 묵묵히 헌신 봉사한 물건들을 최소화해 두어야 한다. 남은 것에 대한 미련도 갖지 않아야 한다. 남아 있는 물건이 없으면 가장 좋을 것이다. 내 몸을 사용하기 시작한 날 내 몸은 빈손으로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보다 너무 많은 것을 갖게 된 지금, 내 몸 사용 마지막일에 대한 준비,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