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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란 Dec 30. 2023

복 받으실 겨

  하루 종일 아들 집에서 두 손녀를 돌보았다. 가끔 큰아들이 주말에도 일이 많다며 손녀를 좀 봐 달라고 한다. 퇴직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손녀를 봐달라는 아들의 부탁이 좋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려 함께 손녀를 돌보러 가는 그 시간 또한 좋다. 혼자 가서 손녀 둘을 돌보기는 힘들지만. 남편과 같이하면 여유롭고 재미도 있다. 아이들 식사나 간식을 챙겨 주어야 할 때도 마음 편히 준비할 수 있다. 


 아이들을 돌봐주고 퇴근? 하는 시간이다. 아들 집을 나와 좌회전하면 곧바로 철도 건널목이 있다. 건널목 간수가 가림 대를 서서히 내렸다. 전철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대부분 이곳을 건널 때마다 서서 기다리는 날이 많다. 지나는 전철 차량도 많고 건너가는 차량도 줄을 잇고 있는 곳이지만, 서울 도심에 아직 이렇게 건널목이 있는 곳이 있다. 나는 여길 지날 때마다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이 건널목이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까? 잠시 멈추어 기다리는 시간도 좋고 느리게 건너는 건널목도 좋다. 옛것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건널목 가림 대가 올라가고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건널목을 건너 차도로 올라왔다. 그런데 뒤차가 갑자기 “빵! 빵!”한다.


  “어떤 놈이야? 여기는 30킬로야, 30킬로!! *****” 


  남편이 갑작스레 큰소리를 지른다. 남편의 입을 손으로 얼른 막았다. 운전을 하면 자주 나오는 상스러운 언어이다. 뒤차의 운전자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한소리 하며 화를 낸다. 혹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싸움이 될까 봐 두려움이 앞섰다. 하루 종일 갇혀 손녀를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피곤하였을 것이다. 큰애는 네 살이고 작은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띠고 있다. 잠시도 혼자 두게 할 수 없다. 끊임없이 장난감, 놀이기구로 함께 놀아주어야 한다. 그래서 더 예민해졌을 수도 있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남편은 고속도로, 자동차 전용도로이든 어떤 곳이든 정해진 속도를 잘 지키며 운전한다. 과속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답답할 만큼 교과서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운전하는 것보다 대중교통 이용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나갈 땐 기꺼이 운전을 맡아서 해 준다. 운전을 자주 하지 않으니 전보다 좀 더 신경이 쓰이는 눈치이기도 했다. 나도 오늘은 남편이 유난히 속도를 못 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루 종일 손녀들과 놀아 주다 보니 더 피곤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느리게 운전을 하다 빵빵거리는 소리를 듣고 속상해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82세가 될 때까지 운전을 했다. 늦게 배웠으나 면허시험 필기와 실기를 한 번에 붙었다며 참 좋아하셨다. 짧은 기간이지만 70이 넘는 나이에 작은 회사에서 운전기사를 했다. 두 분은 늘그막에 늦게 딴 운전면허증으로 추억의 옛 동네를 다니시며 소일하셨다고 했다. 온천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기꺼이 운전해서 온천 나들이를 가던 어느 날, 뭐가 급한지 큰 트럭이 뒤쪽에서 바짝 따라오며 번쩍번쩍거리니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나는 아기를 태우고 다니는 사람들이 차 뒤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 ‘우리 아기 먼저 구해주셔요.’  귀엽게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주의해 달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으면 아무래도 운전자들이 신경을 더 써 주게 된다. 아버지께도 주의 문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부모님께 가면서 《할아버지 운전, 복 받으실 겨!!!》라고 A4용지에 크게 두 줄로 쓰고 코팅해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아버지 차 뒤쪽에 붙여 놓았다. 


  “아버지, 이걸 차 뒤에 붙이고 다니시면 뒤에서 빵빵거리거나 번쩍번쩍하며 다가오다가 이것 보고 조심할 거예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셨다. 처음엔 그리 신통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 표정이었던 엄마도 그걸 붙이고 나간 후로는 ‘큰 차들이 빵빵거리지 않고 슬금슬금 피해 가거나 천천히 오는 것 같더라’ 하며 효과가 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도 재미있어했다고 하니, 딸이 만들어 왔다고 자랑도 한 것 같았다.      


 엄마는 아버지 차를 타고 온천과 옛날 살던 곳을 함께 다니던 때를 많이 그리워한다. 요즘은 자식들에게 가고 싶은 곳을 가자고 하려니 눈치가 보이나 보다. 아버지 안 계신 지금에서야 엄마 하고 싶은 대로 운전해 주셨던 분은 아버지가 유일하시고 아버지가 최고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 내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운 내 아들이지만 아들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남편뿐이다. 나에게 맞추어 주려고 애쓰는 사람도 이젠, 남편밖에 없다. 남편이 최고다. 


 우리 부부가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 나이는 아니지만, 우리도 손녀가 셋이나 있으니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가 맞긴 하다. 그러나 아직 우린 청춘으로 살고 싶은데…. 종종 노인들이 운전하다 돌발 사고를 내는 뉴스를 접할 때면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전에는 나이 든 연예인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방송을 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은 차를 가고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듯, 고령자의 운전면허증 반납을 은근히 유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좀 더 오래도록 운전면허증을 유지하고 싶다. 그러려면 좀 더 건강관리를 잘해야 할 것이다. 


남편과 함께 운전하며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자유가 너무 좋다. 한강을 따라 남편과 강변북로를 달려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나는 이 길을 더 오래도록 즐겁게 운전하며 다니고 싶다. 


  남편을 슬쩍 쳐다보다가 물었다.

 “당신도…, 차 뒤에 《할아버지 운전, 복 받으실 겨!!!》 하고 써 붙여 드릴까요?”


  남편은 코웃음을 치지만, 그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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