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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란 Jan 04. 2024

지우개

오후 세 시쯤이면 나는 은근히 저녁 준비해야 한다며 서두른다. 남편과 나의 눈치작전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남편은 바쁘다고 해보지만 거의 내가 이긴다. 시아를 데리고 오는 동안 집에서 내가 저녁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질문 하나면 게임 끝이다. 


  “당신이 저녁 준비할래요?”

  “알았어.” 

 

마지못해 남편이 나선다. 남편이 시아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와 집으로 오려고 하면, 그분은 놀이터 방향으로 뛰어가 버린다고 한다. 7개월 만에 태어나 애틋한 마음들을 받으며 자라고 있는 그분, 손녀 시아,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몸이 약한데 여기저기 막 뛰어다니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어둡도록 놀다 오고 싶어 하니, 남편은 걱정도 되고 따라다니기도 힘들다고 한다. 남편이 ‘봉와직염’으로 입원했을 때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고 했던 의사 선생님의 말 때문에 가끔 내가 데리러 가기도 했더니 은근히 내가 가기를 더 바란다. 그 이후, 오후 세 시 즈음부터의 눈치 싸움이 시작된 듯하다.  


  우리 부부 둘만 있는 집은 적막함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다. 내가 가끔 남편이 집에 있는지 싶어 불러 보기까지 한다. 오늘은 남편의 눈치작전에 져서 내가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 유치원으로 갔다. 시아를 만나는 순간부터 시아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시아의 목소리가 되어 둥둥 떠오르며 그대로 표출된다. 


  “할아버지가 아니네? 할머니가 왔네.”

  “아빠가 할아버지가 온다고 했는데? 호 회!”

  “할아버지 바쁜 일 있어서….”


 내 머릿속은 시아를 얼른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날씨 춥지? 어서 가자.” 

 시아의 유아용 생생히 보드를 집 방향으로 대기시켜 놓고 서두른다.

 

 “알았어요. 할머니.”


  ‘다행이다.’ 

유치원에서 나오면 놀이터로 가서 한 시간은 놀아야 하는데 오늘은 그대로 간다고 한다. 

‘알았어요. 할머니.’ 그분의 이 말씀이 황송하기 그지없다.


  집으로 가는 길지 않은 길이지만 그 사이에 그분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고 가야 한다. ‘놀이터’와 같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 


  “할머니, 입이 아파요.”

  “어디 어디?”


  입가가 약간 볼그레했다. 아침에 며느리가 시아 입가가 약간 아프다고 ‘립밤’을 발라주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알았어. 집에 빨리 가서 약 발라 줄 게.” 


  길가의 나무, 풀, 길바닥의 돌멩이, 작은 생물…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가의 유혹을 물리치고 무조건 집으로 빨리 가야 하는 구실이 하나 더 생겼다. 그분의 머리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분의 쌩쌩이 보드 뒤로 둥둥 떠오르며 재잘재잘 뿜어져 나오고 있다. 다행히 그분께서 집으로 직행했다. 감사한 일이다.  

  집에 도착해 할아버지를 만나니 


  “할아버지, 왜 안 왔어요?”

  “할아버지 바빴어요.”


  그분이 집에 도착하자 적막강산인 집안은 또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집안 가득 시아의 청아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이건 아빠 선물이에요. 아빠 선물 만들었어요.”

  “오늘은 아빠가 7시에 온다고 했어요.”

  “아빠, 엄마 같이 오면 좋겠어요.”


  물어보지 않아도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오면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는 대로 그분의 목소리로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요즘 말이 너무 많이 늘어서 시아가 집에 있는 시간은 집안이 온통 재잘재잘 시아의 말소리로 가득 찬다. 신통한 말들을 자주 들으니 그 말을 손녀가 했다고 하면 ‘애가 무슨 그런 말을?’ 하며 내가 가끔 거짓말쟁이처럼 되기도 할 것 같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재미있기 그지없다. 


 서둘러 저녁을 준비해 주며 그분의 식사 준비를 해 주었다. 놀면서 하는 그분의 저녁 식사 시간은 거의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빨리 먹이고 싶어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그분의 입에 밀어 넣으려 했다. 자기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입 아프다고 했잖아. 밥 조금.”

  “할머니가 깜빡했어. 미안 혀.”

  눈꼬리를 흘깃하며 나에게 하는 말  


  “할머니 머리에 지우개가 있나 봐.” 


깜짝 놀랐다. 자기가 입이 아프다고 한 말을 내가 잊었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나? 남들에게 손녀가 이 말을 했다고 하면, 내가 거짓말한다고 할 것 같다.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거짓말했다고 할 만큼, 아이들은 깜짝깜짝 놀랄만한 신통한 말들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랬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신통한 말들을 하는 모습이 줄어들기도 한다. 이 창의적인 아이들의 말솜씨를 어떻게 하면 그대로 잘 키워 줄 수 있을까? 오후 세 시 즈음부터 하는 우리 부부의 눈치작전이 부끄러워지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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