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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란 Feb 02. 2023

당당했던 엄마가 사라졌다.

 “나는 우리 엄마를 별로 안 좋아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녀간의 정에 대해 그 어떤 사랑보다 찐하고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나의 친엄마이지만 엄마를 안 좋아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해 왔다. 여동생들과도 만나면 엄마 흉을 보기도 한다. 엄마는 우리 육 남매를 키울 때 나와 여동생을 대할 때와 남동생들을 대할 때 다르게 대했다. 지금도 엄마는 차별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항상 남자가 우선이었고 내가 느끼기에는 차별이 심했다. 그 당시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어린 시절 잠이 많은 나는 아침이 싫었다. 늦게 일어난다며 소리 지르는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다. 한 번도 잔소리나 꾸중을 안 하시는 아버지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척 앉아 있다가 잠시라도 빈틈이 보이면 집안일도 끊임없이 시켰다. 6남매 맏딸인 내가 집안일을 많이 도와야 하는 것을 알지만 끝이 없는 집안일은 내가 느끼기에는 힘들었다. 설거지, 청소, 빨래, 온갖 심부름 등 심지어 6학년 졸업 후 봄방학에 태어난 막내 남동생의 산후 바라지도 내가 했다. 1회용 기저귀가 아닌 천으로 된 기저귀, 아기 옷, 엄마 빨래, 미역국, 쉽지 않았다. 손도 시리고 몸도 추웠다. 엄마의 입과 나의 몸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키운(?) 막내 동생에 대해서는 가끔 내 아들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집을 떠나고 싶을 때가 많았다.

  박봉의 공무원인 아버지와 살림만 아는 엄마의 육 남매 중 맏딸인 내가, 우리 집 형편에 서울유학은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나이인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의 여고에 입학원서를 넣으려고 사촌언니께 부탁했다가 엄마께 들켜 실패를 한 적도 있다. 대학이라도 안동을 떠나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안동에 교육대학이 있어서 그대로 포기해야만 했다. 독립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교사발령을 좀 먼 곳으로 받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과 같이 나와서 자취하며 초임시절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멀리 떨어져 두 아들을 낳고 살다 보니 엄마가 이해되기도 했다. 엄마 말만 따라서했던 나의 집안일 돕기였으니 엄마가 가까이 없는 신혼살림 집안일에 늘 자신이 없었다. 신혼 때 나는 손님 두세 명만 올 일이 있어도 멀리 있는 엄마를 불러댔다. 음식솜씨도 좋고 내가 부르면 좋아하시니 나 중심으로 불러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당당하고 큰소리치는 엄마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가끔 안동 친정을 내려갈 때면 집 근처에 가서 대부분 전화를 한다. 집에 필요한 것을 사서 가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미리 전화하고 사 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엄마 목소리가 달라진다. 큰소리로 주변을 의식하는 듯 자랑스레 필요한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대부분 아버지께 필요한 것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 중심으로 말한다. 경로당 갖고 가서 자식들이 사 왔다고 자랑하며 갖고 가고 싶은 것을 옆 사람 들으란 듯 당당히 주문했다.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자주 입원하며 집에 잘 안 계시게 되자 최근 들어서는 다 있으니 그냥 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대충 내가 알아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 중심으로 사 가기도 했다. 항상 나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시끄러운 엄마보다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아버지만 눈에 들어온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약자다. 

  올해 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인 엄마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장례식 2박 3일 동안 엄마는 거의 잠을 안 자고 아버지 곁을 지켰다. 잔소리는 많고 너무 서두르는 엄마지만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지켜야 하는 것은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 또한 눈에 보였다. 좀 주무시라고 해도 알았다고 말은 하지만 늦게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있다. 엄마 머리는 온통 아버지와 함께 산 세월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서울에서 안동까지 좀 멀지만 자주 가고 전화도 좀 더 신경 써서 자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도 할머니가 되고 어린 손녀들 돌봐 줘야 할 일이 자주 생기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그랬듯이 두 아들은 자기들 중심으로 손녀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떳떳하게 나를 부른다. 부르면 기동 대기조처럼 달려간다. 나도 내 엄마처럼 내 자식 일이 먼저다. 나의 엄마는 늘 뒷전이 되고 있다.      

   안동 톨게이트다. 멀리 떠나 살고 싶었던 안동인데 이젠 더 자주 달려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곳인데 다시 오니 가슴이 뛰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어린 시절 살던 곳이고 우리 육 남매가 뒹굴던 곳이다. 아직 아버지도 계시는 듯하고 엄마가 있는 곳이다.  

  “엄마, 이제 안동 왔어요, **마트여요. 뭐 필요한 것 있어요?”

  늘 물어보았듯이 전화를 했다. 

  “아냐 필요한 것 없어, 다 있어. 막내가 다 사 왔어 먹을 것도 많아.”

하며 막내 남동생을 바꾸어 준다. 옛날의 그 거침없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님, 수박 하나만 사 왔는데 엄마가 더 살 것이 있다 해서 같이 마트에 가서 필요한   것 더 사 왔어요. 그런데 수박은 경로당 갖고 가겠다고 하시네요.”

  “아, 그럼, 우리 먹을 수박 하나 더 사야겠네, 알았어.”

  수박과 몇 가지 장을 더 보고 나와서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아 운전할 수가 없어 길옆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백유지효(伯兪之孝), 잘못을 저지른 아들이 늙으신 부모님께 매를 맞고 예전과 다르게 아프지 않아 몰래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 쏟아내던  엄마가 사라졌다. 이젠 너무 당당히 큰소리치던 엄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막 집에 온 막내 남동생을 데리고 필요한 것 사야 한다며 시장을 간 것이다. 

 이제 엄마는 딸인 나보다 아들인 남동생이 더 편해지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이 멀어진 딸에게 마음도 멀어진 것인가? 언제나 당당히 큰소리치시고 필요한 것을 요구하던 엄마다. 우리 육 남매의 큰 버팀목, 우리가 흉을 봐도 늘 그대로일 것 같은 엄마였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너무 당당한 내 엄마는 어딜 가신 건가!


 엄마, 내가 스스럼없이 흉볼 수 있는 내 친엄마. 

 ‘너무 당당하게 큰소리쳐서, 내가 맘껏 좋아하지 않아도 되는 내 엄마가 더 좋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2021. 7. 10.(토)  에세이스트 100호 수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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