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버리고 싶은 옷이 있다. 종갓집 종손이라는 거북한 옷이다. 외할아버지도 막내, 나의 아버지도 막내다. 그래서 엄마는 제사도 모르고 명절의 힘든 상황도 모른다. 종갓집며느리, 맏며느리의 어려움도 모른다. 엄마는 막내보다 큰아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듯 딸 셋이 맏아들과 결혼해도 만류(?)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조상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 전, 내가 잘하면 되지 무슨 문제인가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갖고, 내가 좋아하면 그만이라며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후는, 가난한 종가의 명절, 제사를 만나 남들이 말하는 쓴맛을 보았다. 종갓집 종손이라는 옷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버리지 못하는 옷이라며 남편에게 징징대고 있다. 그런 내가 최근 버리지 못하는 옷을 또 만났다.
이사를 한 후, 남편과 옷장 정리를 했다. 옷이 너무 많아서, 좀 많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하나 꺼내어 버릴 옷을 찾고 있다. 내가 버리려고 꺼내어 놓으면 남편이 ‘그건 아직 입을 수 있어, 용문 시골에 가서 입으면 돼.’하며 못 버리게 한다. 남편이 버리려고 하는 것은 내가 입겠다고 하는 옷도 있다. 최근에 이사하면서 보니 42년 직장생활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옷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도저히 옷장이 비좁아 옷을 그대로 갖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거의 입을 필요가 없는 정장의 옷도 너무 많다. 웬만큼 오래된 옷은 번갈아 가며 입어야 하니 거의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 퇴직하고 보니 옷을 매일 바꿔가며 입을 일도 없고 똑같은 옷을 매일 입어도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크게 신경 쓸 일도 없다. 옷 두 벌이면 한 철을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엔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옷장을 정리하다 보니 옷 한 벌이 눈에 들어온다. 신혼 때부터 오래도록 행복해하며 입었던 옷이다. 옷은 멀쩡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옷이다. 35년은 넘은 듯하다.
“이 옷은 못 버리겠죠?”, “그렇지 뭐.”
우리는 무언의 미소를 짓는다. 신혼 때의 일이 생각 나서다.
80년대 초, 신혼시절 첫아이를 가져 배가 제법 불러오던 겨울이다. 그때는 육아휴직이라는 제도도 없었고 출산 휴가 2개월이 전부였다. 최대한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출근을 하는 것이 내 몸에도 더 좋다 하니, 출산이 가까워 올 때까지 출근했다. 겨울인데 때마침 큰 교무실의 내 자리 바로 뒤에 난로가 자리하고 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는 정말 좋은 자리다. 교직원회의 시간이 되어 교무실에 교사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짓궂은 선배 교사가 나를 보며 놀려대곤 하기도 한다.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 여~ 있네.”
“복 많은 사람은 달라~~. 복댕이 갖고 있나 봐.”
늘 따뜻이 대해 주는 선배 선생님들이라 그 놀림도 기분 좋게 들린다. 교무부장에게는 엄격하게 대하는 교감선생님도 회의가 없는 날은 일찍 퇴근해도 된다고 하며 나에게는 잘해 주었다. 선배 선생님들은 먹을 것을 나누어 먹을 때도 제일 예쁜 것을 골라서 주기도 하고 회식을 하러 가면 좋은 자리에 앉게 해 주기도 한다. 너무 순진해서 내가 마치 큰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온갖 대접을 다 받았다. 애기가 태어나면 더 힘들어지고 지금이 좋은 때라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많았으니, 그 시간이 느리게 가기를 바라기도 했다. 태교를 생각하며 긍정의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순순히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넓게 가지며 포용하는 자세로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아기를 가지면 남편들도 힘들어진다고 하면서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있으니 마음 넓게 각오해 두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속이 상했다. 아내는 힘든데 바람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마음을 넓게 긍정적으로 갖기로 하고, 남편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살짝 일었다.
‘그래, 통 크게 아예 바람피우라고 멍석을 깔아주자.’
현금을 준비해서 하얀 봉투에 넣었다. 내 봉급의 절반에 가까운 돈으로, 나로서는 큰마음먹고 거금의 돈을 준비한 것이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봉투의 겉면에 쓴 후, 무심한 듯 남편에게 주면서 말했다.
“당신, 필요하면 이 돈으로 여자 만나고 와도 돼요.”
최대한 착한 척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내가 했다.
“무슨 일이야?”
무척 의아하게 묻더니, 신나게 봉투를 받아갔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두고 보기로 했다. 마음이 반반이었다. 내가 말한 대로 혼자 신나게 진짜 잘 놀다 올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다 올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돈을 잘 안 쓰는 사람이니 저축을 할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은 결혼하자 곧바로 자기의 통장과 도장을 나에게 다 맞긴 사람이다. 그리고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정말 성실한 사람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차는 회사차를 타고 다니고 점심도 회사에서 먹는다며 용돈조차 잘 쓰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남편이 무슨 신나는 일이 있는 듯 싱글벙글 거리며 쇼핑백을 하나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갖다 놓고 한 번 보라고 한다. 꺼내어 보니 옷이다. 내 생일도 아니고, 결혼기념일도 아니었다.
“당신이 준 돈으로 사 온 거야.”
남편도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그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나 보다. 그 당시로서는 꽤 유명한 브랜드의 겨울옷으로 캐주얼 코트다. 내가 준 돈보다 더 큰 금액을 주고 산 옷이라고 한다. 나와 아기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기를 바란다는 것 같은 미소를 보인다. 내심 ‘앗~싸, 신난다.’ 외쳤다. 그는 내 시험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 옷을 볼 때마다 그때의 추억에 잠긴다. 이사하며 옷장 정리할 때도 잠시 버릴까 하다 다시 넣어 둔다. 벌써 여러 번. 그건 버릴 수 없는 옷이 되었다.
나는 명절이나 제사 때만 되면 종가의 종부로 결혼하여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산다고 말하고 있다. ‘좋아서 한 결혼인데, 내가 잘하면 되지.’ 했던 내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그때가 다가오면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그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푼다. 남편도 매번 힘들어한다. 결혼 40년이 가까워 오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종가의 종손 며느리라는 그 옷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버리지는 못한다.
이사하며 버리지 못하는 그 옷을 볼 땐, 신혼시절 첫아이를 갖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시간, 그 옷을 만나 행복했던 시간이 다가온다. 내가 남편에게 푼 스트레스가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내일은 그 옷을 입고 나들이 한 번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