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큰 집들은 고조, 증조, 조부, 아버지 4대 봉사(奉祀)와 시제, 명절을 합하여 일 년에 열두 번의 제사를 지냈다.
부모를 모시는 장남의 집을 큰집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동네 큰집들은 그렇게 많은 제사를 지냈고, 더구나 영희 어머니는 아버지 제사까지 더하여 일 년 열두 달에 13번의 제사를 받들었다.
그중에서 큰 할아버지 제사를 '큰제사'라 했는데 동짓달 가장 추운 때에 들어있어서 준비하는 사람도 제사 지내러 오시는 손님들도 모두 수고로움을 더해야 했다. 제사는 할아버지 삼 형제 집안과 사촌지간까지 네 집안이 함께 지냈다. 각 집안 큰 아제(당숙)들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셨지만 주말이 아닌 평일이라도 반드시 참석하셨던 것 같다. 감히 할아버지들의 불호령을 거역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가까이 시집간 친고모들도 오시고 큰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큰고모님들 식구들이 각자 농사지은 것들과 설탕, 사탕, 과자 등을 가지고 큰할머니를 뵈러 겸사겸사 오셨다.
제사음식으로 우리 마을의 특징은 반드시 제사상에 닭이 오른다. 봄부터 키운 닭들은 제사 때마다 한 마리씩 제수용으로 사라진다. 영희와 동생들은 방 안에서 닭의 비명을 귀 막고 듣고 있고 두 언니가 퍼덕거리는 닭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통을 누르고 뒤돌아보고 있으면 엄마가 하늘을 보고 닭목을 비튼다. 바깥에 걸어놓은 물 끓는 솥에 담갔다가 닭 털을 벗겨내어 마련하였다. 낮에 모이를 주고 저녁에는 족제비에게 물려가지 않도록 닭장에 몰아넣어 보살펴 키워 온 닭인데 닭 잡는 그 시간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의례였다.
떡집에서 만든 떡을 찾아와서 상에 올린 건 세월이 좀 더 지나서이지만 70년대에는 쌀을 불려 마을 방앗간에 가져가 갈아와서 집에서 시루떡을 쪄서 준비했다. 작은 아궁이 솥에 물을 붓고 솥 위에 Y자 나무 거치대 위에 옹기로 만든 떡시루를 올린다. 시루에는 젖은 보자기를 깔고 하얀 맵쌀가루를 체로 곱게 쳐서 한 층 내리고 노란 콩고물을 올린 후 또 그 위에 쌀가루를 치고 고물을 올려 켜켜이 층을 쌓은 후 떡을 찐다. 잘 익은 떡은 재빨리 큰 주걱으로 한 층 씩 들어내서 식힌다. 그때 떨어지는 떡 조각은 그 자리서 얻어먹을 수 있다. 그때 먹은 떡만큼 맛있는 시루떡을 먹어본 적이 없다.
장날에 제사장을 미리 봐 놓고 제사 당일에 음식을 준비해서 저녁에 손님들이 오면 식사 대신 다과나 떡으로 시장기만 달래고 밥을 먹지는 않는다. 자정을 지나서 마루에 상을 차린 후 한시 정각에 제를 시작하는데 반드시 남자들만 절을 했고 할아버지들과 장남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었다.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상을 들고 났고 다른 여자들은 얼씬거리지 못했다. 의식을 마치고 참석한 사람들 모두 음복하는데 밥과 나물과 탕국을 큰 대야에 넣고 참기름을 넣어 비빔밥(고추장은 넣지 않음)을 먹으며 상에 올렸던 음식들을 같이 먹었다. 손님들이 가시고 정리하면 거의 3시는 되어야 했다.
영희와 어린 동생들은 제사 지내는 시간까지 잠을 안 자고 버티기는 어려웠고, 자고 있으면 그 시간에 깨워준다는 말을 믿고 잠이 들면 영락없이 아침이 되어서야 눈이 떠진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안일어나더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깨어있던 날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마른오징어 다리를 먹을 수 있었다.
큰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날 새벽에는 마을 어른들 아침식사 전에 제사음식을 가져다 드렸다. 어른이 계시는 집집마다 한집씩 배달했는데 밥, 탕, 나물과 , 떡 한 접시와 고기와 전, 과일은 조금씩 떼어서 차린 모둠 한 접시다. 언니들은 양철소반, 대나무 채반에 음식 차린 것을 이고 영희는 소쿠리 담아 엄마가 일러준 집으로 배달을 가는데 서너 번씩은 갔다 왔다 해야 끝났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길이 미끄러워 아까운 음식을 쏟거나 접시를 깨기도 했으나 그때만큼은 어머니가 크게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음식을 이고 아침을 준비하는 부엌으로 가면 그 집의 그릇으로 음식을 모두 옮겨 담을 때까지 기다린다. 아궁이에 언 손을 녹이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뜨끈한 설거지 물에 접시를 헹구어 주시는 분도 계시고 행주로 접시를 닦아 주시기도 했다. 또 그 접시에 담아 다른 집으로 빨리 배달가야 함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고 아침에 제사음식이 배달이 올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간밤에 손님들이 오고 가는 소리로 알기도 하거니와 수십 년 전 동짓달에 함께 초상을 치렀고 같이 통곡한 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도 할머니 살아계실 적에 다른 집에서 배달된 제사음식이 할머니 아침 상에 오르면 조금씩 나눠 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설 추석 명절에는 차례를 다 지내고 성묘를 돌면 거의 저녁이 되었다. 그때는 여자들은 산소에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일이어서 남자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은 사라져 가는 유교적 이념과 관례가 그때는 마을의 질서가 되고 고된 삶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정신적 지주였지도 모른다. 이 작은 마을에서도 유서 깊은 영산향교의 전교를 맡으신 남자분들이 여러분이 계셨고 여성유도회 회장도 여러분이 지내셨다. '유세차~'로 시작하는 제문을 읽으며 까다로운 격식에 얽매이고 죽은 조상을 숭배하는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고귀한 전통이고 생활이었다. 영희어머니는 화왕산 산불 참사가 있던 2009년 여성 유도회 회장을 맡으셨는데 성금모금 활동을 하는 등 어려운 이웃 돕기를 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렇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콩 한쪽도 나눠먹는 정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사진은 2009년 활동 당시 찍은 사진으로 우리 마을 어머니들 여럿이 함께 맞춘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어머니는 이 옷을 꼭 수의로 입혀달라고 하셨고 이 한복을 입고 아버지와 조상을 뵈러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0년 전 69세에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위 절제 수술을 받기 전날 밤 꿈 이야기다. 하얀 곰의 모습을 한 조상님들이 총출동해서 순서대로 방안에 줄지어 앉아계셨는데 '우리가 보살필테니 걱정 말고 수술 잘 받으라고 격려해 주는 듯했다'라고 한다. 당시 어머니의 소원은 자식, 손자들을 위해 지금은 너무 이르고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는데 조상님이 진짜 도우셨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수술에 성공하고 딱 10년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지금은 제사수도 줄고 격식도 간소화되었지만 남동생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떠나고 난 세대에는 사라질 옛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