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들
어린 시절, 나의 첫 룸메이트는 할머니였다.
부모님이 일터로 나간 빈자리를 할머니가 오롯이 채워주셨기에,
나의 유년기는 온통 할머니의 냄새와 손길로 가득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뒷산 약수터에 올랐다.
시원한 약수를 뜨고 나면 우리는 배드민턴 채를 잡았다.
우리 할머니는 80대 초반까지 동네 체육대회에 대표 선수로 출전해 메달을 휩쓸 만큼
배드민턴을 엄청 잘 치셨고, 항상 산에 다니셔서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건강하셨다.
그때의 나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할머니는 손맛도 참 좋으셨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다시 맛볼 수 없지만,
할머니가 해주신 ‘김치국밥’은 여전히 내 인생의 최애 음식이다.
큼지막한 국물 멸치를 툭툭 던져 넣고 잘 익은 김치와 함께 푹푹 끓여내던 그 투박하고 깊은 맛.
유난히 배가 고픈 날이나 마음이 허한 날이면,
모락모락 김이 나던 그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이 지금도 간절히 생각나곤 한다.
물론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 나는 할머니가 미웠던 적도 많았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매운 시집살이를 시키는 엄한 시어머니였고,
엄마가 남몰래 눈물 훔치는 날이면 나는 그 화살을 할머니에게 돌리곤 했다.
좋았다가도 얄미웠고, 애틋하다가도 틀어지곤 했던,
말 그대로 뜨거웠던 룸메이트 사이였다.
그런 우리 사이를 다시 다정하게 묶어준 건 ‘노래’였다.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니시던 할머니는 트로트를 참 좋아하셨다.
나는 라디오 테이프를 돌려 들으며 노트에 가사를 꾹꾹 눌러 적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가사지를 받아 들고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할머니의 얼굴.
그 작은 종이 한 장에 할머니의 이쁨을 독차지하던 풍경이 지금도 선명하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 같던 고부 사이에도 계절이 바뀌듯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양복점을 그만두시고 음식점을 시작하면서 엄마의 고생이 말도 못 하게 깊어지던 때였다.
날카롭기만 하던 할머니의 시선이 어느덧 고생하는 며느리를 향해 유해지기 시작했다.
엄마를 챙기기 시작한 할머니를 보며 내 마음속 엉킨 실타래도 조금씩 풀려나갔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거나 좋은 일이 생기는 날이면 나의 손길은 분주해졌다.
우리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고왔으면 하는 마음에 얼굴에 정성껏 분칠을 해드리고 머리 드라이도 해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만져드리는 머리 손질을 유독 좋아하셨다.
쑥스러운 듯 환하게 웃으시던 그 모습이 좋았고, 나는 더 신이 나서 드라이기를 돌리곤 했다.
잔칫날 고모들을 만나면 고모들은 할머니의 머리를 보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셨다.
"어머, 엄마 오늘 머리가 왜 이렇게 고와? 우리 선영이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고모들의 기분 좋은 호들갑과 손녀 노릇 톡톡히 한다며 쥐여주신 빳빳한 용돈은
어린 내게 세상 무엇보다 큰 훈장이었다.
그 시절, 정갈하게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마친 우리 할머니는 참으로 고우셨다.
철이 들고서야 나는 할머니의 삶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온 여인.
아들이 아들이자 남편의 몫까지 해주길 바랐던 그 외로운 삶의 무게를 감히 짐작해 보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아빠의 짐과, 그 모든 풍파를 받아낸 엄마의 인내,
그리고 미망인으로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외로움까지.
넉넉지 못한 형편 속에서도 각자의 자리를 지켜낸
세 사람에 대한 애틋함이 내 마음속에 뿌리내렸다.
그 마음을 깨달은 뒤로 나는 정말 효녀가 되었다.
20대와 30대 내내, 어디를 가든 할머니께 드릴 선물과 간식을 먼저 챙겼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쪽으로 더 넓게 흐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할머니의 김치국밥 냄새와 포근한 분 냄새가 섞여 있다.
할머니는 나의 첫 친구였고,
내가 처음으로 '타인의 인생'을 연민하며 사랑하게 해 준 소중한 룸메이트였다.
지금도 문득 드라이기를 들 때면 거울 속에서 환하게 웃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참 고왔던 우리 할머니,
오늘따라 참 많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