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몰랐다
2021년이었고 지금처럼 더운 날이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었고, 어서 여름방학이 시작되기만을 바라고 있기도 했다. 나는 첫째를 학교에 입학시키고, 말도 못 하게 힘든 1학기를 보내던 중이었다.
"어머니. 친구들이 그러는데 철수가 급식시간에 식판을 앞에 두고 앉아서 씨발씨발 욕을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그러고 있더라구요."
선생님께 전달받은 내용이었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받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드리고 아이와 이야기 나눠보고 잘 교육시키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눈물이 핑 돌았다. 휴대폰 액정에 1학년 교실 전화번호가 찍히는 날에는 항상 마음이 무겁고 슬프고 우울했다. 바닥을 치던 우울감은 아이 얼굴을 바라보면 분노로 바뀌었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한계에 도달했다. 그때의 나는 아이의 마음을 만져주고 아이에게 공감하고 아이와 잘 풀어보고자 애쓰던 중이었다. <참을 인>을 삼키며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쌓이고 쌓여 나는 병들어갔다. 하지만 그때는 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집에서 아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직접 아이를 데릴러 가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의 등하교를 위해서 교문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얼굴 아는 엄마들이라도 만나면 인사하고 말을 섞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놀이터라도 지나다가 아이가 놀고 싶다고 하면 집에 가야 한다고 실랑이 벌이는 것도 피곤했다. 몸이 힘들거나 일이 바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 놀이는 대게 싸움으로 끝났다. 아이는 문제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 했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변명으로 친구의 화를 돋구었다. 도저히 컨트롤이 안 되는 아이를 데리고 낯선 엄마들과 아이들틈에서 나는 너무 난감했고, 화가 났으며 창피했다. 물론 학교에서도 아이의 평판은 나빴다. 아파트 아이들은 죄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시스템이었으니, 동네 엄마들의 아이에 대한 평판 또한 좋았을 리가 없다. 펜데믹 믹이어서 1학년 아이를 둔 엄마들이 새로운 인맥을 만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아이가 졸업한 유치원에서 우리 동네 아이는 자기 혼자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외딴섬이 되었고, 아이 또한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하교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는 아마 제대로 대답하지 못 했을 것이다. 항상 그랬다. 자기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장황하게 풀어내고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학교생활이나 친구들과의 일에 대해 얘기할 때는 모른다고 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또한 아이가 adhd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소리지르거나 매를 들지 않았을 뿐, 나는 언제나 취조하는 경찰마냥 아이에게 질문을 해댔다. 아마 아이는 엄마가 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절망한 엄마의 얼굴과 슬퍼하는 표정에서 막연한 불안함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 날의 이야기를 끝맺어 보자면 나는 처음으로 아이 앞에서 울었다. 엉엉 울었다. 처음부터 울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충분히 힘들었지만 아이를 탓하지 않고, 보듬어 주려고 애쓰던 와중이었는데 아이는 더 이상해졌다. 멀쩡한 상황에서 식판을 앞에 두고 씨발씨발 했다는 것이 기괴했다. 차라리 친구에게 시비를 걸거나 친구와 싸우다가 욕을 했다면 덜 이상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소파에 앉혀 두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했다. 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인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지 니가 한 번 겪어보라는 취지였다. 지금까지 너에게 당근을 썼으니 이제는 채찍을 쓰겠다는 심보였다. 삼십분 가량 욕만 했더니 나도 힘이 빠졌다.
"엄마. 무서워. 그만해. 이제 욕 안할께"
아이가 울면서 빌었다. 나는 계속 울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 뒤로 아이는 욕하지 않았고, 다시 원래의 착한 아이가 되었고 엄마와 아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말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반쯤은 맞는 결말이다. 그 뒤로 아이는 혼자 욕을 중얼거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문제행동들이 교정되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버전이 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