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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로오렌 Aug 16. 2023

나를 돌아보아야 할 때.

나는 덜 배운 어른이다. 

어릴때 나는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욕을 하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욕할 용기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혼자 욕을 내뱉고는 만족해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혹은 아무도 듣지 못 할 것. 이 두가지가 내가 욕을 하는데 꼭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사춘기가 되자 대부분의 아이들이 욕을 썼다. 나는 친구들이 욕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그때 우리는 할 줄 아는 욕이 별로 없었다. 숫자 18을 활용하는 기발한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욕 대신에 <사탕>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함께 주고 받았던 욕에는 사실 분노가 없었다. 그냥 장난같은 것이었고, 정말 감정이 격해져서 싸울때는 욕을 하지 않았다. 여느 사춘기 소녀들처럼 싸울때는 주저앉아 울어버리거나 책상위에 엎드려서 울었던 것 같다. 


"너, 너무해. 흐흐흑. "


순정만화에서나 볼법한 대사를 내뱉으면서 말이다.


합법적으로 술집출입이 가능해진 나이가 되어서는 욕을 거의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꼭 욕이 튀어나왔다. 역시 분노는 없었다. 욕을 하며 깔깔거리거나 욕을 하며 울었다. 욕을 하며 비틀거리기도 했고 욕을 하며 잠을 잤다. 술이 술술술 들어가던 어린 시절이라 술이 나를 먹는지도 몰랐다. 몇 번 바닥을 뒹굴고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고 나서야 술을 술술술 마시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품격있는 알콜러로 탈바꿈 된 후에는 술을 마셔도 욕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실수 하는 날이면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사과를 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사회인이 되면서 나의 <욕>에는 감정이 생겼다. 그리고 다양한 <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눈으로 욕하는 법. 소리내지 않고 욕하는 법. 몸으로 욕하는 법. 욕인지 모르게 욕하는 법 등. 이때부터 나의 <욕>은 나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욕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꼭 욕을 하지 않아도 분노를 다스리는 많은 방법이 있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 했다. 화가나면 욕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게 욕 한마디 내뱉고 마음을 비울 수 있었던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요즘은 본인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많은 이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사람들이 간혹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더 나은 어른이 되었다. 욕도 물론 한다. 하지만 욕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아야 할 때, 해도 소용없을 때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욕>으로 퉁쳤던 내면의 소리를 단어와 문장으로 조리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쉽게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분노를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노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못 본척 피하기, 아닌 척 속이기 등의 기술을 익혔던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더 흘렀다. 나는 더 나은 어른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10살 아이는 5살 마냥 행동한다. 단단한 머리뼈에 가려져 한 번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녀석의 뇌는 발달이 더디다고 한다. 대부분의 ad아이들처럼 1학년때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2학년때 약복용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참 좋았다. 아직 어리고 순진한 아이는 엄마의 바램대로 약을 잘 먹었고, 학교 생활도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약은 치료제가 아니다. 몸안에 약기운이 머무는 동안만 아이는 누가 보기에도 훌륭한 모습이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본래의 능력을 되찾곤 했다. 넘치는 기운과 절제할 수 없는 행동력...이랄까. 전환은 또 어찌나 빠른지 하루 24시간도 ad아이들에게는 부족해 보인다. 


ad 건 정상발달 아이이건 비껴갈 수 없는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다. 아이의 에고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요즘은 사춘기도 뇌의 움직임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뇌의 복합적인 움직임 덕에 아이의 몸과 마음이 날뛰는 시기. 그 시기가 내 아이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공격당하고 있다. 


나는 내면을 잘 다스리지 못 한다.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내려놓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운이 좋게도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자식 키우는 일은 피하거나 내려놓을 수 없다. 어떤 어른이 되는 것은 결국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이다. 하지만 아이의 선택의 역량을 키우는 것은 아이가 처한 환경의 문제이다. 그리고 내 아이가 처한 환경의 9할은 가족이다. 9할을 또 나누고자 들면 내 몫이 제일 클 것이다. 그래서 자식일에는 포기가 없다. 모른척 피할 수 없다. 아닌척 두고 볼 수 가 없다. 


나는 요즘 내 아이만 보면 화가 난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경에 거슬린다. 눈에 안 보이면 좋을 것 같은데 하필 방학이다. 약을 먹이면 아이의 반항기가 올라온다. 약을 안 먹이면 아이의 ad 기질이 올라온다. 내 입장에서는 전자가 좀 더 낫다. 약을 먹고 헛구역질을 하고, 밥을 못 먹고 생기없이 퍼져있는 모습이 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을 안 먹은 상태에서 그저 해맑게 5살 마냥 행동하는 143cm는 결코 곱게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는 결과에만 연연해한다. 과정이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몰입해서 눈에 뛰는 성취를 이루어내도, 성취가 주는 영광이 기쁜 것이지 지난 과정이 보람된다고 느끼지는 못 한다. 과정이 지치고 힘들다는 것도 느끼지 못 한채 그저 기쁘게 몰입하기 때문이다. 혼이 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도 마찬가지다. 결과에만 연연하고 그 결과에 따른 본인의 감정만 중요하다. 왜 혼이 났는지, 상대방이 어떤 마음으로 화를 내는지 혹은 슬퍼하는지 공감하지 못 한다. 행동조절, 감정조절이 미숙하고 개선의지가 없다. 막연하게 더 나아져야지 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더 깊게 생각할 수 없는 상태다. 사춘기라는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아이가 더 견디기 힘들다. 


요즘 나는 다시 분노에 찬 욕을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 하다가도 욕이 나오고, 빨래를 개다가도 욕이 나온다. 내 눈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행동거지>가 아니라 <꼬라지>가 되었다. 아이의 공격레벨은 1인데 나의 방어레벨은 100이다. 아이의 공격레벨이 100이어도 나의 방어레벨은 100이다. 아이가 어떻든간에 나는 똑같이 화가 나고, 그 화를 참지 못 한다. 그렇게 화를 내고 속이 풀어지는 거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화를 내고 또 욕을 하고 나면 창피함이 몰려온다. 죄책감이 든다. 


이제는 나를 돌아볼 때인 것 같다. 나는 내 안에 가득찬 분노를 직면해야 한다. 버티고 견뎌야 하고, 다스리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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