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었다며 올해는 어떤 계획을 세워볼까 고민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9월도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작년 6월에 할머니를 보내드렸고 올해 첫 제사를 지낸 참인데도 나는 마치 올 여름에 할머니를 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다. 사실 올 해 봄에는 세째 고모를 보내드린 터였다. 이제 육십이나 되었을까. 성인이 된 아들딸을 두고 떠나는 고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홀로 남은 남편이 더 안 타까웠을까. 갑자기 뇌사에 빠져버린 고모는 누구와도 작별하지 못 한채 병원에서 잠깐 머무시고는 그렇게 가셨었다. 이 또한 너무 오래된 일인 것 만 같다.
올 해 여름에는 많은 일을 했다. 몇 년을 벼르고 벼르던 백제문화유산 투어를 했고, 난생처음 카라반에서 휴가를 보냈다. 월풀까지 갖추고 있는 카라반은 럭셔리 그 자체였지만. 이음새 사이사이를 파고든 검은 곰팡이와 블라인드 사이사이에 알고 싶지 않은 이물질에서 이 카라반은 거쳐간 많은 습기와 벌레와 사람들과 벌레 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짜를 세어보자면 꼬박 2주를 내내 물놀이만 했다. 바닷가, 수영장, 워터파크 등등. 온천욕 빼고는 다 해 본 것 같다. 다행히 베란다뷰가 바다인 해양도시에 살고 있는지라 반나절 혹은 당일치기 바다 물놀이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유니클로에서 구매한 햇빛차단 겸 바람막이와 래쉬가드 하의를 갖춰입고 크록스의 뒷굽이 닳도록 물놀이를 다녔다. 쿠팡 구매목록에 튜브만 5개가 뜬다. 1호는 물 속에서 아쿠아로빅을 혼자 터득했고, 2호는 구명조끼를 바지처럼 입고 앉은 채로 둥둥 떠다닐만큼 물과 친해졌다. 실제로 그렇게 입고 놀다가 안전요원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나는 발목만 시꺼매졌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절기가 가을임을 알렸음에도 아직 날이 더웠다. 나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보드게임 친목회 날짜가 잡혔다. 평소라면 미리 올 맴버들을 확인하고 어떻게 안부를 전할지 고민했을 테지만, 나는 모임장소에 도착해서야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지 알게 되었다. 웃음짓기도 힘들어 데면 데면 사람들과 인사했다. 피곤해보인다는 사람들이 염려는 격한 긍정으로 응답했다. 그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게 이런 거구나. 우리 벌써 만난지도 2년이 넘어가니 그냥 그렇구나 저냥 저렇구나 한다. 아니면 다들 바쁜 부인들이다보니 사소한 일들이 늘어가는 것일까.
출퇴근하는 것과 아이들 밥때는 조율할 수 없으니 차치하고 나머지 시간들을 쪼개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 밤에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주말에 혼자 외출할 일도 없다. 평일 오전 반나절이 오롯이 내 몫이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사람만나고 혼자 놀기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보고 넷플보고 전화통화 하고 커피마시고 수업준비도 하고 운동도 하고. 두가시 이상의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때 트러블 없이 스케쥴을 잘 조정하는 것은 나의 특기다. 나는 자차가 있고, 운전에 능숙하며 무엇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스치기만 해도 이해해준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인걸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쁜 사람. 늘 바쁜 사람. 대부분의 일들은 무던하게 처리가 된다. 돈을 냈다면 돈을 조금 손해보면 되는 것이고 시간을 써야 한다면 양해를 구하면 될 일이다. 보통은 미리 다 조율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때 아닌 더위 탓일까. 나는 날짜를 착각하는 실수를 범했다. 다행히 돈 받고 하는 일들은 아닌지라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했지만 마음 한 켠이 불쾌감은 덜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요란했던 오전을 어쨌든 무사히 보냈다. 일하러 가면서 친구와 통화를 했다. 점심은 먹어야 하는데 밥집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출근하는 길에는 세 개의 드라이브 쓰루가 있었는데 맥도날드, 스타벅스 그리고 써브웨이였다. 사실 써브웨이의 드라이브 쓰루를 이용해 보고 싶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 하고 있던 중이었다. 별안간 용기가 샘솟았다. 서울 사는 친구의 세련됨에 기대고 싶었나보다. 친구의 아바타가 되어 그녀가 전하는대로 주문해보기로 했다.
"이탈리안 비엘티 주시구요, 15cm에 빵은 위트요. 칠리와 어니언 소스 주세요. "
세 번 연습한 후 드라이브쓰루로 차를 몰고 들어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샌드위치 하나만 주문하세요?"
연습과 다르다.
"야채는 다 넣어드릴까요?"
블루투스 전화기 넘어 친구가 침묵한다.
"치즈는 어떻게 드릴까요?"
때마침 친구가 모짜렐라로 시작해서 아메리카로 끝나는 치즈 이름을 불러주어서 들리는 그대로 읆었다.
"그러니까..어떤 치즈로 드릴까요?"
친구가 세 개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다시 긔띔했다. 아. 치즈가 세개라서 이름이 길었구나.
"아..아메리카노요"
<노>라는 단어는 못 들었기를 ... 간절히 바랬다.
"소스는 어떻게 드릴까요?"
"칠리와 어니언이요."
"다른 토핑은요?"
그냥 주세요, 제발! 이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주문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대로 픽업대까지 건물을 따라 돌면서 친구와 나는 소녀처럼 깔깔댔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알고보니 친구도 써브웨이는 가본적이 없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 샌드위치를 받았다. 정말 바쁠 때에는 여기 들르면 안되겠다고 가격은 얼마일지 궁금하다며 최근들어 가장 재밌는 순간이라며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샌드위치를 까서 먹다보니, 드라마속의 인물들이 써브웨이만 가면 고개를 옆으로 꺽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격하게 키스할때마냥 이리 저리 각도를 재는 것이 영 먹기 불편했다. 하지만 맛은 좋아서 다음에 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알고보니 내가 먹은 것은 이탈리아 BLT가 아니고 BMT 였다. 다음에는 이탈리아 BMT 주세요 라고 꼭 얘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