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저항하라_서울장애인 인권영화제 참관기

by 운틴


23회째다. 매년 장애인인권영화제가 있다는 뉴스를 들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하는지, 프로그램엔 뭐가 있는지 궁금해하기만 하다가 몇 년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이번엔 회사에서 보여주는 연극을 같이 보러간 교회 선배가 연극 상영관 옆인 마로니에 공원에서 영화제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영화제 시작일인 금요일에 선배가 갈 거라고 했지만 무심히 들어서 회사 행사 후 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올해도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주제가 ‘장애인’이기에 영화제를 다녀오면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았다. 솔직히 내 경험은 한계가 있고 만나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다른 장애인들은 어떻게 사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토요일에도 다른 일정을 짜려고 하다가 꼭 마로니에 공원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집에서 가까와 부담도 없는데 선배가 같이 가준다기에 신이 났다. 내겐 큰언니 같은 선배다. 마침 흐린 날씨라 야외 광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기에 좋았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 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 같은 부스들이 마음에 들었다. 노숙자, 동성애, 장애인, 노점상 등 권리를 찾으려고 투쟁하는, 길에서 자주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상영되었다. 모두 무료였고 기부금을 내고 싶으면 원하는 단체에 기부할 수 있었다.


동대문구 노점상에 대한 영화인 『길』을 먼저 보고 서울역 근처에 있는 노숙자들에 대한 영화인 『병풍을 찢고서』를 보았다. 청량리역 부근에 새로 지은 아파트 때문에 그곳에서 장사하면서 평생을 머물던 사람들이 쫓겨나게 되었다. 서울역 부근의 노숙자들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치인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밥을 퍼주는 쇼를 하느라 그 배경인 병풍이 되어왔는데 그 병풍을 찢고 영상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번 영화제의 주제는 ‘기록으로 저항하라’다.


이어서 본 『마루와 내 친구의 결혼식』은 길에 버려진 번식견 마루와 뇌병변 장애인인 친구의 임신-결혼에 대한 영화다. 마루는 번식견으로 버려지는 과정에서 자궁을 들어내는 큰 수술을 해야할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는데 그 비용을 출산과 결혼을 앞두고 가족들의 냉대를 받고 있는 주인공의 친구가 내주었다. 영화는 중증 장애인도 애완견을 키울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홀라당 넘어간』은 센터에 다니는 정신 장애인들의 이야기다. 보이스피싱에 사기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정신장애인의 망상에 의한 해프닝을 다룬 영화로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 나도 장애인이지만 내가 모르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는데 이날 영화를 보면서 편견이 많이 희석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나오는 관객과의 대화가 있어서 영화와 별개로 그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정신장애인 한 분은 본인들이 마음이 아픈 사람이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다고 직설적으로 말해주어서 잘 이해가 되었다. 조현병, 망상 등의 병은 마음을 다스려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하루를 온전히 인권영화제에 빠져서 마지막날 행사도 포기할 수 없어 교회에 갔다가 일요일에 또 마로니에 공원에 갔다. 이날도 선배언니가 동행해주었는데 이 언니는 나처럼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다행히 우리는 안들리는 귀가 서로 다른 쪽이라 들리는 귀를 나란히 하고 앉아 대화를 나눈다. 아주 찰떡 같이 잘 맞는 사이다.


『소리의 소리』와 『천사의 드라이브』는 장애인 부모를 둔 감독들의 이야기였는데 장애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 사회가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경험한 내용이다. 영화 후원을 요청하러 찾아간 관계자가 장애인인 아버지를 팔아서 작품을 만드냐고 빈정댔다는 말엔 정말 화가 났다. 영화를 본 후 나눈 관객과의 대화가 너무 진솔하고 좋아서 앞으로 계속 제작을 할 예정이라는 이 감독들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더 나아가 나도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고 싶어져 선배에게 선배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니 펄쩍 뛴다.


이어진 행사로 브라질 리듬의 난타 공연이 있었는데 관객이 무대로 뛰어나와 같이 춤을 출 정도로 신나고 열정적인 공연이었다.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탈시설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희망의 기록2』도 감동적이었다. 마음 놓고 공연을 볼 수 있게 자막 통역, 수어통역으로 애쓰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도 사회를 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분도 멋졌다. 어떤 장애를 가졌든지 얼마나 가난한지 상관 없이 누구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걸 이번 영화제를 통해 실감했다. 준비한 모든 관계자 분들께 박수를 보내며 내년엔 더욱 멋진 장애인 인권영화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KakaoTalk_20250526_200426683.jpg?type=w1600
KakaoTalk_20250526_200426683_01.jpg?type=w1600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청각장애인도 연극 영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