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을 뻔한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기념관

by 운틴


내가 속한 청각장애인 단체에서 오늘은 민주화운동기념관에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2025년 6월 10일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가 참여한 것은 <2025년 민주화운동기념관 접근성 향상 프로그램>이었는데 기념관에서 해설사 선생님과 수어통역 선생님이 여러 분 나오셔서 진행해주셨다.


요즘 베스트셀러 중 성해나 작가가 쓴 『혼모노』라는 소설집이 있는데 이 책의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가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다룬 소설이다. 때맞춰 읽은 소설의 실제 공간을 찾아간다는 긴장감 보다는 박종철 열사와 김근태 의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곳이라는 공포가 컸다. 밖에서 보기엔 특별한 점이 없는 건물이었지만 기념관 철문은 엄청난 기계가 작동되어 탱크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를 내며 눈이 가리워진 채 대공분실에 잡혀온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고문실이 있는 5층에 가려면 1층에서부터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 계단은 아주 폭이 좁은데 철제로 되어 있어 걸음을 뗄 때마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 감각을 잃고 눈이 가려진 연행자들이 도착하는 곳은 5층이다. 이곳은 아주 작은 창을 가진 방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문을 엇갈리게 마주하고 있는데 맞은 편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는다. 방에 한 번 들어가면 고문자들이 원하는 말을 하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 마음대로 불을 켤 수도 없는 게 스위치는 문 밖에 있고 안에서 하는 행동은 모두 천장에 설치된 카메라에 촬영된다. 심지어 천장 위에 안보이게 마이크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방안에서 주고받는 낮은 말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지만 고통 때문에 내는 하이 톤의 비명 소리는 멀리 옆방까지 퍼져나간다.


소설에서 읽은 것처럼 김수근 건축가는 사람이 언제 가장 고통스럽고 빨리 절망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창을 아예 막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밖의 빛이 새어들어오게 만들어 동지의 비밀을 누설하기만 하면 살아서 밖의 햇살을 쬘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고문을 하다가 지겨워지고 일이 진척되지 않으면 고문자들은 건물 마당의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했다. 그들은 온갖 고문 도구들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운동을 하며 여가를 누리고 3층에 있는 소파에서 쉬거나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님이 아들을 기리기 위해 9호 방을 거의 원형으로 보존했는데 그 방 외에 다른 방은 침대를 떼거나 책상을 떼어내는 등 원형이 많이 훼손된 눈치였다. 역사의 현장을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라 아직도 논의 중인 것 같았다.


고문실이 있는 건물 외에 다른 건물에는 민주화운동을 위해 고난받거나 애쓴 분들의 흔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최초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인데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피해에 노출되는 사람은 그 사회의 약자다. 군인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을 때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 제일 먼저 죽은 건 의미심장하다.

견학이 끝나고 같이 간 협회 회원들은 해설사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고 작년 말에 겪은 내란 사태를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내란범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남영동 대공분실이 다시 과거의 용도를 되살려 누군가를 고문하는 곳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문의 현장을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다시 보러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친숙해진 남영역으로 향하는데 몸이 뜨거운 이유가 햇볕 때문인지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헷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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