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 자막을 입히고 수어통역 영상을 같이 띄운 영화는 이제 시범 사업이 끝났는지 다른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시범 영화를 보러 가보니 자막 안경을 보는 시스템을 실험 중이었다. 개인 폰에 앱을 내려받거나 개인 폰으로 앱 다운로드가 안 되는 경우엔 주최 측에서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영화가 시작되어 안경을 끼고 보니 안경 아래, 혹은 중간에 자막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전에 호주에서 이런 안경을 쓰고 청인과 청각장애인이 영화를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본다는 말을 들은 게 떠올랐다. 안경으로 영상을 보면서 자막을 보는 방식인데 안경이 무거운 게 아쉬웠다. 안경만 끼면 비장애인과 같이 한국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이어폰을 빌려주고 화면 설명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장애의 종류와 상관없이 같이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관에는 장애인을 위한 동시 관람 장비 무인 대여함이 따로 있었다. 한쪽에 설치된 대여함 안에는 핸드폰과 안경이 있었는데 이 시스템이 정착되면 이전처럼 장애인을 모아 놓고 따로 영화 상영을 하는 게 아니라 아무 때든지 원하는 날 원하는 시간에 와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첫 상영회라 설명할 시간이 필요해서 상영이 지체되고 어수선했지만 뭐든 처음 하는 때가 있으니, 앞으로는 잘 진행될 것 같다.
문자 통역 기기를 나눠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내 뒤쪽에 혼자 온 여성이 있었다. 청각장애인은 대부분 아는 사람끼리 모여서 오거나 영화관에 와서 모여 있는데 혼자 있어서 눈에 띄었다. 내가 갖고 있는 기기 설명서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말씀을 잘하셔서 청각장애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이분은 보청기를 끼지 않고 핸드폰의 앱을 켜놓고 내가 하는 말을 핸드폰의 자막을 보고 알아들었다. 농인 단체에 소속된 분도 아니어서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 상영회가 끝난 후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본 영화는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좀비딸>이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대체로 코믹한 내용이어서 즐겁게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이날 처음 만난 분과 영화관 로비에 앉아 말을 나눴다. 난청이 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농인들과 교류하지 않고 100% 청인 사회에서만 사는 분이었다. 그런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분은 뮤지컬이나 연극에서 배리어프리 공연을 할 때 자막이 나오는 안경을 써본 적이 있다고 했다. 문화 생활에 관심이 많아 공연이나 영화를 많이 보러 다니는 분 같았다. 친구들과 해외여행도 다니는데 자막 앱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고 했다.
아쉽게도 길게 말씀을 나누지 못했고 자기 이야기가 드러나는 걸 싫어해서 나에게 들려준 말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했다. 나는 청각장애에 대해 비장애인들이 많이 알면 알수록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상심했던지 애인에게 고백했는데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시 먹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태까지 꽤 많은 경험을 했다고 자부했는데 아직도 세상은 나에게 모르는 것 투성이다.